저승제
- 작성일
- 2015.12.14 15:07
- 등록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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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군 현경면 용정리에서 오류리로 이어지는 긴 재가 있습니다. 이 재를 당초에는 저승재라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봉오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안~지도간 도로가 개설되고 포장까지 되어있기 때문에 승용차로 다리면 몇 분밖에 거리지 않지만 옛날 이 재는 주위에 울울창창한 수림이 우거진 사이를 헤집고 소로를 가르마처럼 간신히 뚫려있어 이 재를 넘노라면 대낮에도 음산하고 오싹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재가 길고 주위 환경이 험하기 때문에 간간이 이재에는 산적이 출몰하여 죄 없는 행인들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목숨까지 앗아가는 일 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러니 이 재를 넘는 행인들은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삼삼오오 대오를 지어 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 재에는 주막집도 없었고, 더더욱 살림하고 사는 집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에 강산사(糠山寺)라는 명찰(名刹)이 있었는데 강산사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재를 넘어야 했습니다. 이 절은 풍광이 수려하고 선기가 감돌며 산세가 좋아 스님들이 수양하기에 좋은 절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충청도 땅 어느 조그마한 절에도 불도(佛道)를 닦는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강산사에 대한 명성을 들은 그 스님은 그 절에 가서 수도할 것을 자정하고 백일을 부처님께 매달려 기도한 뒤 자기 결심을 스승에게 아뢰었습니다. “강산사는 불자가 수도정진하기에는 아주 좋은 가람이나 강산사를 가는 길에 긴 재가 있는데 그 재를 외지인(外地人)이 넘게 되면 살아오지 못한다 하니 단념하도록 해라.” 하고 스승은 간곡히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인생이 죽고 사는 것은 정해놓은 이치인데 하잘 것 없는 목숨 잃는 것이 두려워 불도 정진의 결심을 꺾을 수 없는 소승의 심정을 헤아리시고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 번 결심이 굳게 선 젊은 제자의 뜻은 단념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설득했으나, 도무지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젊은 스님은 강산사를 찾아 먼 길을 떠난 후 열흘만에야 고생고생 끝에 저승재를 넘게 되었습니다.
정산에 오르자 서산에 걸렸던 해도 져버리고 어두움과 함께 강한 눈보라가 솔숲을 핥으며 사정없이 휘몰아 쳤습니다.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인가라고는 찾을 수가 없고 맹수들의 울부짖음만 간담을 서늘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땅거미가 들 무렵부터 내린 함박눈은 어느새 허벅지까지 쌓이고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움에 곧두박질하기를 수 없이 했습니다. 며칠을 굶은지라 기운이 쇠잔해져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입은 한 겹 옷으로는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을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 스님은 밤새껏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눈길에 곤두박질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스님의 혼백은 구천을 외롭게 떠돌아다니다 귀신이 되어, 혼사(婚事)를 치른 후 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들마다 괴롭혔습니다. 뒤늦게야 젊은 스님 원혼의 장난임을 안 사람들은 허기진 스님 귀신을 달래기 위해 이 재를 넘을 때마다 떡 한 석작씩 놓고 갔으며, 그 이후로는 별일 없이 재승재를 통과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젊은 스님의 죽음을 애달프게 생각하여 이 재를 저승재라 불렀으며 신행길에 떡 한 석작씩 놓고 가는 풍습은 조선말엽까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