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안
1863년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에서 출생.
어릴적부터 예능에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나 일찍이 서편제의 거성인 이날치 선생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혀 득음을 하였으며 한학에도 열중하여 지예(知藝)를 겸한 소리꾼으로 당대의 명창 정정열, 이동백 등과 활동하다 어전광대로 추천되어 고종의 아들인 의천왕에게 장단을 가르치기도 하여 고종으로부터 사고참봉(종9품)의 벼슬을 제수받은 국창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창극의 창시조이다.
당시 서울 청계천 2가(현 3.1빌딩 앞) 수표교 건너편에 청국인의 창극관에서 청국의 연예인들이 삼국지를 연회하는 것을 관심을 갖고 관람한 선생은 우리 판소리도 극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창작하여 춘향가를 최초로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 협률사와 원각사에서 활동하다 평양으로 옮겨 후배양성에 전력하다 1902년 8월 4일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니 그 문하생은 물론 전국의 명인 명창들이 선생을 추모하며 한달여에 걸쳐 상여를 메고 고향인 무안까지 운구하였다.
강태홍
효산 강태홍은 1893년 3월 21일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명인 강용안이다.
어릴적부터 부친에게 국악을 익히다가 8세때 부친을 여의고 가난속에 서도 국악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후 고향을 떠나 경상북도 대구에 거처를 정하고 30여년 동안 경주권번과 달성권번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가야금산조 및 병창에 심혈을 기울여 그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신을 감동케하는 가락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강태홍류는 다른 산조보다 접가락이 배이상이며 매우 독특하고 개성이 있어 다음 장단을 걸고 넘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개구리 소리, 바람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등 무슨 소리든지 가야금 음률에 담았다.
고전 무용에도 명성을 떨쳤으며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겨 강태홍무용연구소, 한국무용음악연구소등을 개설하여 여러 제자에게 입춤, 수건무, 승무 등을 가르쳤으며 무용보를 채보하였다.
또한 가야금 산조뿐 아니라 양금, 해금, 단소등에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으며 산조와 풍류를 구음보로 정리하였는데 악보에는 일심이라 적었고 병창으로 화초타령, 대장부가 등을 즐겼고 연기력 또한 뛰어나 심봉사역, 곱사춤은 탁월하였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는 1979년 5월 김춘지를 보유자로 부산광역시 중요무형문화재23호로 지정받았으며 그가 사망한 후 효산의 마지막 제자인 신명숙씨가 보유자가 되어 1989년 7월 6일자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면서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보존회가 발족되어 현재까지 매년 추모행사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제자로는 박초월, 김소희, 안비취등 당대의 모든 국악인들이 문하생이었다.
강남중
1896년생으로 숙부 강용안에게 일찍 노래를 배워 십여세에 이미 장단에 맞춰 목청을 돋우었다 한다. 얼굴이 준수하고 몸매가 날씬하며 구술 구르듯한 맑은 목소리가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여세에 서울 성악연구회에 들어가 오태석, 송만갑, 정정열씨 등에게서 사사하였는데 수궁가의 토끼타령, 흥부가의 박타령, 새타령등은 누구도 추종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 존재였으며 당대의 명창 임방울 선생과 쌍벽을 이룬 명창이었다.
30여세에 두서너 차례 일본 고려레코드사에 취입차 도일했다 하나 취입여부는 알 수 없고 강남중판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있다.
서울에서 한양창극단을 조직하여 우리나라 각 지방은 물론 만주 상해 일본의 북해도 동경 대광등지를 두루 공연을 하였는데 강남중은 이 도령역을 맡았다고 한다. 특히 강남중은 풍신도 좋고 목소리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꼽사춤은 일품이었으며 창과 반집은 국중에서 손을 꼽았다고 한다. 한번은 일본에서 창극을 할 때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하여 천황사경찰서에 잡혀가 20여일을 감금당하면서 일본어 창을 요구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양쪽고막이 터져 평생을 귀머거리로 살았다.
그 후 일본 관헌의 강요에 못이겨 일본군 위문 공연단으로 활약하였는데 일본구주 공연차 도일 하였을 때는 해태(김)속에 태극기를 넣어가지고 가서 우리국민에게 나누어 주면서 애국심을 일깨워 주었고 그때 이 화중선이 죽으니 창극단을 데리고 귀국하여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후에는 일본군 위문이 화근이 되어 친일파로 몰려 곤욕을 치었으나 곧 풀려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여 팔도강산을 누비면서 공연을 하였다.
여순 반란 사건때는 전남도 경찰국의 주선으로 군경위문차 공연중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으며 주로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구국이념을 담은 노래를 불렀고 백범 김구선생의 애국심을 흠모하고 따르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구선생으로부터 오현이라는 호를 받았으나 이것이 자유당계의 미움을 받게 되어 대동가극단을 운영하기 어렵게 되자 모두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노후생활을 보냈으며 박초월, 박귀희, 김여란등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군에서는 3인(人)의 명인명창을 기리기 위해 1998년 군립국악원에 명인명창 예적비를 건립하고 추모 국악제를 개최는 물론 매년 가을 [승달 전국 국악대제전]을 개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