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의 출현과 용마
- 작성일
- 2015.12.1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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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異人)의 출현과 용마(龍馬) 전설
목포에서 버스를 타고 임성역을 지나 일로읍을 향해가는 고개를 넘으면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한 동네가 눈에 차는데 이 마을이 삼향면 맥포리입니다. 이 맥포리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맥포리에 인심 사납기로 유명한 이 선비의 집에 여구라는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여구는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산 같아 웬만한 나무 정도는 손으로 뽑아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동작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것이 번개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씨는 순박하여 포악하고 사나운 이 선비의 말에는 순종하였습니다. 여구는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올 데 갈 데 없었기 때문에 이 선비 집에서 꼴머슴으로 들어와 다섯 해를 살았으나 새경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이 선비 밑에서 혹사만 당하고 있었습니다. 장래 일은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지만 여구에게는 단 하나 이 선비의 딸인 꽃님 아가씨를 훔쳐보는 게 낙이었고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여구의 마음은 엉뚱하게도 항상 꽃님 아가씨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꽃님 아가씨가 사랑채 앞마당을 지날 때면 새끼 꼬던 손길을 멈추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창구멍으로 눈길이 향하고 있었습니다. 샛별 같은 눈동자, 아담하게 솟은 콧날, 곱게 빗어 땋은 칠흑 같은 댕기머리, 엷게 분단장을 한 얼굴이 복사꽃처럼 피어올랐고, 반회장저고리에 시원스러운 갑사치마가 날아갈 듯 보였습니다.
오룡산에서 불어온 바람 따라 꽃님 아가씨의 분 냄새가 창구멍을 통해 풍겨와 여구의 후각을 한없이 자극했습니다.
‘자기 처지도 모르고 머슴 놈의 주제에 무슨 망발이냐?’
스스로를 꾸짖으며 마음을 돌리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꽃님 아가씨의 자태가 미치도록 눈에 삼삼하게 떠올랐습니다. 눈이 쌓여 하릴없는 겨울에는 이 선비 명령으로 자기 가족들은 흰 쌀밥을 먹으면서 여구의 밥은 항상 보리죽이었습니다. “머슴 놈 주제에 날마다 빈둥빈둥 놀면서 어떻게 세끼 밥을 다 먹어. 꽃님아! 여구에게는 보리죽을 따로 쑤어서 끼니때마다 주도록 해 라.” “원 아버지도, 머슴도 똑같은 사람인데 한 지붕 밑에서 식구들은 쌀 밥 먹고, 머슴에게만 보리죽 먹으라고 할 수 있어요?” “여보! 꽃님이의 말이 맞아요. 당신은 밤낮으로 사서삼경을 읽는 선비 가, 몰인정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이 년들이 무슨 말들이 이리도 많아. 가장이 하라하면 할 일이지.” 이 선비의 꽥! 고함소리에 인정 많은 꽃님 아가씨모녀도 어찌할 수 가 없었습니다.
꽃님 아가씨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놋그릇 반쯤 까지 흰 쌀밥을 눌러 담고, 그 위에 보리죽을 채워 끼니때마다 여구의 상을 따로 차렸습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여구의 마음은 더더욱 꽃님 아가씨를 향하는 고마움과 사모하는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삭풍한설 몰아치는 긴긴 겨울도 지났습니다. 산야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오룡산에 진달래 꽃물이 번지는 새봄이 돌아왔습니다. 새봄이 되니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준비하던 이 선비는 더욱 분주하게 서둘렀습니다. 주야로 잠을 설치면서 글을 읽고, 이 선비 부인과 꽃님 아가씨는 이 생원 한양 갈 때 입을 새 옷을 짓느라고 부산을 떨었습니다. 과거 날짜를 한 달 앞두고 이 선비는 말을 타고, 머슴 여구는 괴나리봇짐에 하나 가득 생필품과 짚신등속을 꾸려 등에 진 채 말고삐를 쥐고 이 선비 앞서 걸었습니다. 이때 마음씨 고약한 이 선비는 집안의 재물을 모두 돈으로 만들어 자신의 옷 속에 숨겨 갔습니다. 주색잡기와 노름을 좋아하는 이 선비인지라 과거시험길에도 재산을 모두 처분해 몸속에 지닌 것입니다.
좁은 맥포 마을에서만 살던 여구의 한양 길은 모든 것이 경이의 연속이었습니다. 발 딛는 곳마다 새로운 산천이요. 보는 것마다 놀라운 것들 뿐이었습니다. 오룡산에 진달래 붉게 타는 때 떠났었는데 한양에 도착했을 때는 진달래꽃은 이울고 인왕산 하얀 바위틈에 빗방울 같은 철쭉꽃이 한 두 송이 번지고, 곱게 성장한 청춘 남녀의 산보(散步) 가는 발길이 분주했습니다. 호시절 모든 것들은 기쁨이 충만한 채 돌아가는데 여구는 기쁨보다 오히려 슬픔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느껴야 했습니다. 뱃속에서는 항상 꼬르륵 소리가 나고, 다 헌 짚신을 끌고 다닌 거친 발은 한양 길에서 돌부리와 가시에 찔리고 물집이 잡혀 터져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 이 선비는 한양 가는 동안 끼니때가 가까워지면 여구에게는 떨어진 곳에 마초를 먹이도록 하거나 심부름을 보낸 후 혼자서만 게 눈 감추듯 끼니를 해치우고, 여구가 돌아오면 시치미를 뗀 채 발길을 재촉하는 행위가 점심때마다 거의 되풀이 되었습니다.
“나는 과거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끼를 먹어야 하지만 여구 너는 노자도 떨어져 가고 하니 하루에 두 끼만 먹도록 해라.” 배고픔을 참는다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똑같이 한양 길을 가는데 누구는 편하게 말 타고 가면서 세끼 밥을 배불리 먹고, 자신은 선비의 말고삐를 잡고 종일 걸으면서도 겨우 두 끼밖에 못 먹는데 대한 인간적인 배신감에서 오는 서글픈 감정이었습니다. ‘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여구의 가슴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내 신분이 이런 걸 어찌하랴.’ 하고 체념도 하여 보지만 때때로 주인에게 부당하게 당할 때에는 단단히 골탕 먹여 코를 납작하게 꺾어주고 싶은 마음이 불길 같이 일었습니다. 여구 일행이 지나가는 길옆으로 쌍두마차 몇 대가 덜컹거리며 쏜살같이 지나가자 여구가 고삐를 쥔 말이 깜짝 놀라 갑자기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말 타는 실력이 서툰 이 선비는 마상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지나가던 행인들이 배를 쥐고 웃었습니다. 창피를 당한 이 선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이 멍청한 자식아! 뭘 생각하느라 말을 이렇게 엉망으로 모는 거냐? 머슴인 너를 비싼 밥 사 먹여가며 한양까지 데려올 때는 주인을 잘 모시라는 뜻이 아니더냐.” 이 선비가 가지고 있던 말채찍이 인정사정없이 여구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여구의 얼굴은 피가 범벅이 되고 지네가 지나가듯 채찍 맞은 자리가 파란 무늬를 그렸습니다.
“주인님, 아무리 머슴이기로서니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머야! 이 녀석이 자기 잘못은 모르고 주인에게 눈 부라리며 대들어!” 또 한번 사정없이 채찍이 날아들자, 여구는 정신없이 얼굴을 감싼 채 진흙탕 길바닥에 무너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정없이 휘두른 채찍이 여구의 눈두덩을 가격했기 때문입니다. “여보! 글줄이나 읽은 선비 같은데, 이거 너무 과 한거 아니요?” 그 때 이 정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붉은 낯선 젊은이가 다가와 충고를 했습니다. “내가 부리는 아랫것에게 정신 차리라고 치도곤을 좀 안겼거늘 남의 일에 당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여보쇼 시골 선비! 아래 사람이나 윗사람이나 사람은 다 같은 사람 인데, 대수롭지 않은 실수 따위로 얼굴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논단 말이요.” 기골이 장대한 젊은이가 큰 눈을 부라리자 뒷심이 물은 이 선비는 더 큰 봉변당할 것이 두려워 아무소리도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습니다.
장안은 이 선비처럼 과거를 보기 위해 팔도에서 올라온 선비들과 그들을 모시고 온 종속들로 크게 붐볐습니다. 이 선비는 벽보에서 과거시험에 대한 요령을 알리는 방문(榜文)을 몇 번이고 읽어본 후 여구를 부르더니 “한양이란 데는 산 사람 눈깔도 빼가는 데니 바로 같이 말고삐 놓지 말고 내가 과거 보고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여관에 방을 잡아 여장을 풀고, 지친 말은 마구간에 매어놓은 후 마초를 주고, 여구에게도 편히 쉬도록 해야 하건만 지독한 구두쇠인 이 선비는 여관비가 아까워 여구와 말을 한적한 곳에 세워놓은 채 황망한 발걸음으로 과거장을 향해 가버렸습니다.
주인을 불러 남은 끼니를 해결할 돈을 달라고 하려다가 너무도 무섭게 일그러진 이 선비의 낯빛에 말할 용기를 잃고 그만두었습니다. 이 선비가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儒巾)을 쓰고, 일산과 등룡, 지필묵 등속을 챙겨 과거장으로 떠난 뒤 여구는 길가의 파릇파릇한 새 풀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말에게 꼴을 뜯겼습니다.
주인 말대로 한다면 말고삐를 잡은 채 한 자리에 서있어야 하나 말 못하는 짐승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주인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풀을 찾아 자리를 이탈한 셈입니다. 말에게는 배불리 꼴을 먹였건만 정작 여구의 배에서는 정오가 지나가 꼬르륵 소리만 나고, 채찍 맞은 얼굴의 상처는 더욱 쓰려왔습니다. 저잣거리에 즐비한 음식점에서 풍겨오는 요리냄새는 군침을 삼키게 하는데, 이역 땅에서 엽전 한 푼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적셨습니다.
‘오 년 동안이나 남의집살이 하면서 제대로 세 끼 밥도 못 얻어먹고 뼈 빠지게 일을 했건만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동안 고용살이한 새경 줄 것을 간청하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흉년에 굶어 죽지 않도록 먹여준 것만 해 도 어딘데 배은망덕하게 새경을 달라 한다.” 라고 주인 이 선비가 오히려 큰소리를 쳐 여구를 꼼짝 못하게 한 일들이 다시금 뇌리를 어지럽혔습니다. ‘이러다가 평생을 이 선비의 종노릇만 하다가 떠꺼머리총각 신세도 면치 못한 채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이 상태로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그렇다 나 자신이 크게 변하지 않고는 무엇인가 이룰 수가 없다.’ 여구는 모든 지혜를 다 짜내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시행하는 첫 조치로 주인이 타고 온 말을 저자에 나가 처분하고 받은 지전은 식수를 담아마시던 표주박 속에 모두 구부려 감춰버렸습니다. 그리고 개울에 가서 표주박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양심의 가책에 마음이 아팠습니다만 ‘이 말 판 돈은 5년 동안 머슴 산 새경일 뿐이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 으면 영영 주인의 밥놀이 밖에 못할 신센걸.’ 여구는 마음대로 주인의 말을 처분하고 돈을 숨긴 것에 대해 스스로 명분을 세우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과거시험이 끝나고 땅거미가 장안에 깃들 무렵, 과거본 유생들은 물론이고 이에 관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시결과를 발표한 방(榜)이 붙은 게시판을 향해 모여들었습니다. 합격자를 성적순으로 나열한 방을 본 응시자들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소리 내서 우는 급제자, 반대로 탈락한 수험생의 오열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떨군 채 자리를 뜨는 유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위가 어두워져 행인들의 얼굴이 희미할 무렵, 이 선비는 술이 잔뜩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몰골로 여구가 있는 곳을 찾아 왔습니다. 이 선비의 거동이 어슴푸레 눈에 띄자 여구는 눈을 찔끔 감고 말 팔 때 미리 잘라 두었던 말고삐를 꼬옥 붙든 채 서있었습니다.
“야! 이놈아 너는 상전도 안 보이냐! 못된 자식!” 소리와 함께 여구의 뺨에서 철썩 불이 일었습니다. 여구는 아픔을 삭이면서 “엇, 주인님! 장원급제 하셨겠지요?” “이놈아 너 같은 놈 때문에 재수가 옴 올라 될 일도 안 된단 말이 야!” 자기 실력이 부족해서 낙방한 이 선비는 애꿎은 여구에게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놈아 도대체 우리말은 어디다 두었느냐. 응-?” “아뿔싸! 이걸 어쩌나. 주인님이 한양은 산 사람 눈 빼가는 곳이라 해 서 그 동안 소인은 눈 꼭 감고 말고삐만 붙들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 었습니다요.” 하고 능청을 떨었습니다. “무엇이 이 개만도 못한 자식,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그것이 말이 되느냐?” 이 선비의 발길이 사정없이 여구의 몸을 쓰러뜨리고 짓이긴 후 한길가에 선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 도리깨질하듯 후려 팼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감싼 채 매를 맞다가 여구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급하게 길에 고인 물을 여구 얼굴에 끼얹자 부스스 눈을 떴습니다. 온몸에 낭자한 피로 여구가 입은 흰옷은 붉은색 옷으로 변했습니다. 짝짝. 어디선가 수라군의 짝짝이 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네놈은 죄가 대가로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건 후일로 미루고, 우선 보기 싫으니까 개울에 가서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몸도 씻은 다 음 저기 보이는 주막집으로 빨리 오너라.”
이 선비는 순찰 중인 순라포졸에게 발각되면 경을 칠까 두려워 잔뜩 겁을 먹은 채 여구를 보냈습니다. 여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머리에는 끈적끈적한 선지피가 얽혀있고, 개울에 비치는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제 모습 같지 않았습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지근지근 쓰려오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는 떼어먹으려는 새경을 받았을 뿐이다. 비록 방법은 정당하지 못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여구는 자기가 한 행동을 애써 합리화 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녀 같은 꽃님 아가씨의 얼굴이 떠올라 여구 자신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더 강해지자.’ 일하다 다치기라도 할 때면 곧잘 사용하던 방식대로 피가 흐르는 상처 부위에 띠뿌리를 돌멩이로 쿵쿵 찧어 발라 지혈이 되도록 한 후 옷을 벗어 빨래를 했습니다. 청명한 하늘에는 초저녁별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먼 산에서 귀촉도의 절규 같은 울음이 산들바람에 실려 구슬프게 들려왔습니다. 그럭저럭 빤 옷을 말리지 못한 채 입었기 때문에 봄의 찬 기운이 아픈 상처를 더욱 쓰리게 했습니다. 주막집으로 돌아왔을 때 “굼벵이라도 삶아 쳐 먹었느냐? 젊은 놈 행동거지가 왜 그리고 느 려.” 이 선비는 바늘과 실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여구의 저고리를 벗게 한 다음, 붓글씨를 휘갈겨 쓴 흰천 한 조각을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저고리 등받이에 꾸민 후 다시 입게 했습니다.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 싫으니 지금 당장 맥포 집으로 내려갈 것이 며, 옷에 꿰맨 서찰은 집에 당도한 즉시 안방마님에게 뜯게 하되, 타 인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면 그날로 죽을 각오를 해 야 할 것이야.” 카랑카랑한 주인의 목소리가 오히려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주인 곁에 떠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네, 주인나리 말씀하신대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여구는 괴나리봇짐을 챙긴 후 이 선비에게 넙죽 절을 한 다음 황망히 객사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문득 여구는 주인 이 선비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미가 급하고 술과 도박을 좋아하는 이 선비가 자신의 말대로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 내년에 치르는 과거시험을 무사히 치를 것이라는 생각이 안들었습니다. 지금껏 보인 이 선비의 행동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선비는 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하였으며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집에서 챙겨 나온 재물로 주색잡기는 물론 노름할 것이라는 생각이 여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여구는 숨어서 주막에 있는 이 선비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역시나 이 선비는 해가 지도록 잔뜩 술을 퍼마시고 있었습니다. 이 선비의 좌우에는 기상들이 앉아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으며, 이따금 이 선비의 술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이 선비의 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마 이 선비가 술 취해 쓰러졌나 봅니다. 다시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복면을 한 검은 그림자 둘이 이 선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주막 담장 너머에서 이를 지켜보던 여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이 이 선비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선비의 수중에는 가산을 처분해 마련한 재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노리기 위해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생각이 들자, 여구는 머리에 두른 두건으로 복면을 하고 잽싸게 이 선비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는 이 선비와 술을 마시던 기생들은 보이지 않고, 검은 복면을 한 두 도적이 이 선비의 입을 틀어막고 손과 발을 묶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이 선비는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여구가 방안에 들어가자 검은 복면을 한 두 도적은 깜짝 놀라며 여구를 향해 칼을 휘둘러 왔습니다. 칼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한 여구를 바라보는 검은 복면의 눈빛이 칼날처럼 싸늘했습니다. 살기가 느껴지는 비범한 고수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날렵하기로 소문난 여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구는 방문을 열며 들어가는 순간 검은 복면을 한 두 사람의 눈에 흙을 뿌렸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에 흙이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움켜 싸고 엉거주춤하는 두 사람의 팔을 꺾어버렸습니다. 칼이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여구는 검은 복면을 한 두 사람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했습니다. 마침내 검은 복면의 두 도적은 그 자리에 꼬꾸라졌습니다. 먼저 이 선비와 같이 술을 마시던 두 기생은 실은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의 조종을 받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검은 복면을 한 두 도적은 기생들의 기둥서방이었습니다.
기생들은 이 선비가 술을 마시면서 돈 자랑을 하자 이 선비의 돈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척 하다가 술상 밑에 둔 그릇에 술을 버리고는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선비만 술에 취해 있을 때, 기생 하나가 기둥서방에게 연락을 하고, 연락을 받은 기둥서방들이 이 선비 방에 들이닥친 것입니다. 이들의 소행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몇 해 전부터 아예 기생들과 기둥서방들이 작당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빼앗긴 사람들은 어디에다 하소연을 하지 못했습니다. 술에 취해 돈을 빼앗긴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보면 묶인 채로 발가벗겨져 있고, 옷은 없었습니다. 기생들과 검은복면을 한 사람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뒤였습니다.
여구는 두 도적을 줄로 꽁꽁 묶고, 그들의 자백을 받아 뒷방에 숨어있는 기생들을 관가에 끌고 가 넘겼습니다.
여구는 아직도 술에 골아 떨어져 정신을 못 차린 이 선비를 보자 화가 났습니다. 과거보러 가면서까지 집안의 모든 재물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도적들로부터 지킨 이 선비의 재산을 고스란히 이 선비에게 줄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주색잡기로 탕진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여구는 돈 열냥을 이 선비의 주머니에 넣어 두고는 주막을 빠져나왔습니다. 이 선비가 정신을 차려 개과천선하기만을 바랐습니다. 여구가 한양을 빠져 나갈 때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루 종일을 굶은 여구의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고픈 배를 물로 채우고 장안을 빠져나와 한적한 시골마을에 이르렀을 때 마치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노자가 떨어져 하루 종일 요기를 못했습니다. 댁 의 일을 도와드리고, 대신 잠자리와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요?” 혼주는 쾌히 승낙하고 떡 벌어지게 한 상 차려왔습니다. 진수성찬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운 여구는 새 힘을 얻어 열심히 잔치 집일을 도왔습니다.
인절미 만들 것을 걱정하는 주인을 안심시킨 후, 한가마 족히 되는 찹쌀 고두밥을 메로 쳐 떡을 빚을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때 주인은 “우리 집은 힘없는 아녀자들뿐이라 찰떡 치는 일이 제일 걱정이 됐는 데 손님께서 이렇게 도와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콩고물이 떨어 져 고물을 묻히지 못한 떡이어서 미안합니다만 충분히 드릴 터이니 길을 가시다가 시장하시면 드시지요.” 주인은 사례로 콩고물이 부족해 미처 묻히지 못한 인절미 한 바가지를 창호지에 싸주고 따듯한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여구는 오랜만에 따뜻한 방에서 지내면서 무슨 생각이 있는지 인절미로 그릇을 만들고 하룻밤을 편히 거한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노글노글 끓는 방에 등을 대고 자고나니 매 맞아 쑤시든 몸이 몰라보게 거뜬히 나았습니다.
바위틈에 붉게 타는 철쭉꽃을 대하니 고향 맥포 마을이 더욱 그립고, 선녀 같은 꽃님 아가씨 생각이 더욱 간절히 납니다. 신분이 낮은 자신이 주인집 딸을 그리워 한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고 한심스러운 일로 판단되었습니다. 이제는 잔칫집에서 떡도 배부르게 먹었겠다, 괴나리봇짐 속에는 잔칫집 주인이 준 콩고물 없는 찰떡으로 그릇도 만들어 담았겠다, 여구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활보하다 보니 주인 샌님에게 매맞은 생각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처럼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고 상쾌했습니다. 아지랑이 넘실대는 푸른 하늘에서는 노고지리가 비쫑비쫑 재잘거리며 물결치는 푸른 보리밭에 꽂혔다 하늘 높이 솟구칩니다. ‘내가 이대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자유스러 운 속에서 아름다운 꽃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일생을 동거동 락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산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구나.’ 여구는 한 동안 꿈속을 헤매다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구릉을 몇 번이나 휘돌아 밭 사잇길로 나서자, 노오란 배추꽃이 눈부시게 피어 진한 향기를 풍기고, 밭 둔덕에서는 꿀벌 치는 농부가 벌집에서 꺼낸 소초를 시루에 담고 꿀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길가는 양반! 싸게 드릴 터이니 꿀 좀 사시지요.” “그럼 싸게 한 바가지만 주시겠소. 마침 내 괴나리봇짐 속에 백 바 가지가 있으니 이 바가지에 가득 채워 보시오.” 주인집 말 판 돈과 이 선비의 재물을 꽃님 아가씨에게 그대로 갖다 주려고 절대 쓰지 않기로 각심했기 때문에 그 돈 말고 자신의 돈은 땡전 한 푼이 없었습니다. 여구는 넉살 좋게도 양봉치는 농부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농부는 흥정도 하지 않은 채 여구의 바가지에 벌꿀을 넘치게 부었습니다. “저자에 가져가면 닷 돈은 능히 받을 수 있지만 손님은 특별히 넉 돈 만 내시오.” “에끼 여보쇼! 아무리 그런다고 저 너머 동네에서는 한 바가지에 두 돈만 내라고 해도 안 샀는데 무슨 꿀이 그리고 비싸단 말이요.” “젊은 사람이 남의 물건 가지고 그렇게 염치없이 깎는 것 아니요. 마 수니까 덤으로 한 보시기 더 줄 터이니 사려거든 사고 말려거든 그 냥 비우시오.” 주인이 그러기를 바라고 새빨간 거짓말로 수작을 건 여구는 옳다고 생각하고 백 바가지에 담았던 꿀을 주인의 꿀 독에다 부어 놓았습니다. 떡으로 빚은 그릇은 상당량의 꿀을 머금고 있지만 주인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여구의 전술은 멋지게 성공한 셈입니다. 한 나절을 걸어 두메산골 오솔길 곁에 우람하게 서있는 느티나무 그늘에 이르자 시장기가 들고 피곤이 엄습했습니다. 여구는 떡으로 빚은 백 바가지를 해체한 뒤 나누어 괴나리봇짐 속에 넣고 그 중 한 덩이를 조금씩 떼어 산골 물을 마시면서 먹는 맛이 표현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선식(仙食)이 이런 맛일까? 세상에 나와서 이런 맛을 보는 것은 내 생전 처음이야.’ 굴러다니는 돌을 베개 삼아 낮잠을 청해 봅니다.
바로 코앞에 펼쳐진 논에는 진분홍색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자운영이 꽃바다를 이루고 있고, 너울너울 춤추는 나비와 붕붕대는 꿀벌들의 군무가 봄이 깊어 감을 대변해 주고 있었습니다. 여구는 폭신폭신한 금잔디의 감촉을 등으로 느끼며 스르르 오수에 잠겼습니다. 산벚꽃이 산들바람에 실려 함박눈 같이 하얗게 나부끼고 있는 숲길을 헤치며 한 처자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처자는 갑사댕기를 휘날리며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며 내닫고 있습니다.
달려오는 처자를 향해 괴나리봇짐을 진 한 떠꺼머리총각이 달려가더니 뜨거운 포옹으로 한 덩이가 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포옹하는 처자와 총각은 다름 아닌 여구 자신과 주인집 딸 꽃님 아가씨였습니다.
“꽃님 아가씨! 꽃님 아가씨!”
허공중에 두 손을 펼쳐 허우적거리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 계속 꿀 수 있는 꿈이라면 차라리 목숨을 포기하고라도 영원히 그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꽃님 아가씨는 내가 꽃님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 같이 진정 나를 사 랑하고 있을까?’ 아버지인 이 선비의 명령을 어기고 보리죽 속에 흰쌀밥을 꼭꼭 담아 상 차려 주던 선녀와 같은 마음을 지닌 꽃님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아가씨가 나에게 베푼 것은 불쌍한 머슴을 동정하는 인정일 뿐이야. 내가 아가씨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발이지.’
한동안 빛을 내뿜던 여구의 눈동자는 빛을 잃고, 하릴없이 먼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멍청이 앉아있던 여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고리 등받이에 주인 이 선비가 꿰맸던 서찰이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내용일까? 분명히 좋은 내용을 쓸 리는 없고, 집에 도착한 즉시 포도청에 고발하라는 내용일까? 아니면 마을 사람들에게 덕석몰이 한 다음 주살(誅殺)을 하라는 내용이라도 쓰여있는 것은 아닐까?’
갑작스레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이걸 몰래 뜯어서 읽어보고 감쪽같이 꿰매 놓으면 좋으련만 여구는 서당에 다닌 일이 없기 때문에 거의 까막눈에 가까웠습니다. 이 때 여구가 지나왔던 한양 쪽 길에서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두메를 진동하더니 한참 있다가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키가 육척이나 되고 얼굴이 준수한 한 청년이 말을 멈춘 뒤 내렸습니다.
“어! 형씨는 장안에서 채찍을 맞던 그분이 아니요? 벌써 여기까지 오 셨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한양에서 주인 이 선비로부터 여구가 채찍을 맞을 때 구해주었던 얼굴이 붉은 청년 선비였습니다. 청년은 진정으로 반가운 듯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선비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은혜를 입고 늘 마음으 로 감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는 떠도는 과객이요마는 형씨는 어디까지 가시는 길인지요?” “저의 주인집은 전라도 무안 땅 맥포라는 마을에 있는데 주인 선비는 과거에 낙방하신 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떠나시고 저만 혼자 내려 가는 중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는 세상을 혼자 떠도는 것이 좋아 바람따라 구름 따라 길이 가는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여구는 키 큰 선비가 하는 말이 알쏭달쏭하여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선비님 말씀은 저 같은 무지렁이에게는 잘 이해가 가 지 않는군요.” “그럴 것입니다. 제가 저를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 환멸을 느껴 정처 없이 떠도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 졌거나, 재물과 명예를 지닌들 무엇하겠습니까. 제가 깨달은 것은 사 람답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소망일뿐입니다. 세상에서 부당하게 당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점은 형씨도 저와 비슷한 것 같 습니다. 같은 처지의 형씨에게 세상에서 방황하며 사는 저의 처지는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키 큰 선비는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멍 하니 바라보더니 말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장안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양반 가문 조 아무개의 서출 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두 살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자, 정실 되는 큰어머니의 강짜에 못 이겨 우리 어머니는 북한산 뒷자락 외진 마을 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는 칭찬을 들으 며 자랐고, 열서너 살이 되었을 때는 경서(四書五經)와 시문(詩文)에 통달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습니다. 본래 우리 아버지는 만 석 군이었으나 서얼은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국법 때문에 밭 한 뙈 기도 받지 못한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저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가진 애를 다 쓰셨고, 저는 그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오직 과거에 합격해 벼슬자리에 등극하여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 냈을 때에야 양반계습에 속한다할지라도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저는 날마다 술로 서글픈 마음을 달래었고 그때부터 방랑벽이 생겨 산천을 주유(周遊)하게 된 것입니다.” 조 선비에 이어 여구도 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털어 놨습니다.
여구가 살아온 억울한 이야기를 다 들은 조 선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무리 그렇다고 잘 사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 정 일한 대가도 당연히 줘야하는 새경을 떼어 먹다니 말이나 된단 말입니까?” “부끄럽습니다만 몇 번이나 새경을 계산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밥만 안 굶고 사는 것만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윽박질러 이대로 주 인이 하는 대로 있다가는 새경 한 푼도 못 받겠구나, 하는 위기감에 새경을 받는 수단으로 말을 처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생각 을 바꾸어 말을 처분한 돈과 도적으로부터 구한 이 선비의 재산을 그대로 이 선비 집에 갖다 드리려고 합니다.” “형씨가 주인 허락도 없이 말을 팔았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 니다. 그러나 그 돈과 이 선비의 재물을 이 선비 집에 갖다 드린다 고 하니, 그 생각이 참으로 대견합니다.” 조 선비는 엽연초를 말아 길게 빨고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꾸엉 꾸엉 ~ 건너편 산에서 날개를 치는 장끼의 긴 울림이 울려옵니다. “선비님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제 몸에는 주인께서 마님께 드리라고 편지를 한 통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절대 누구에게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지엄한 분부를 곁들여서 말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 편지를 지금 볼 수 있을까요?” “남의 편지를 함부로 읽어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만 지 금 형편이 형편이고 보니 어쩔 수 없군요.” 여구는 옷섶에 꿰맸던 주인의 서찰을 떼어내 조 선비에게 주었습니다. 서찰을 읽어본 조 선비는 “형씨는 집에 들어가면 죽이라고 했군요. 여구 때문에 과거도 합격 못하고 빈털터리가 돼 죽을 지경이라고요.” 여구는 대충 어떤 내용이 쓰여있을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편지내용을 직접 전해들은 기분은 너무나 소름이 끼쳤습니다. “조 선비님, 저를 사려주는 셈 치시고 주인이 써준 이 서찰을 다른 내용으로 바꿀 수 없을까요?” 조 선비는 여구의 과거를 더욱 세세하게 물어본 다음, “지금 형편으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군요. 형씨 생각대로 가는 데 까지 가 볼 수밖에요. 아무리 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딸하고 사는 사위를 어떻게 하겠어요. 저는 이 선비에게서 인정으로 호소하려 합 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꽃님 아가씨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지금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러자 조 선비는 잠깐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새로 서찰을 썼습니다. 그리고 조 선비는 서찰을 여구에게 읽어준 후 가지고 있던 바늘과 실로 여구의 옷섶에 원래대로 꿰매어 주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낙방했기 때문에 부끄러워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일년 동안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새 사람이 되어, 금의환향하겠다. 그리고 그동안 지켜보니 비록 여구가 신분이 낮은 사람이기는 하나 우리집과 꽃님이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구가 집에 가면 꽃님이와 당장 결혼 시켜 라. 그리고 앞 텃밭에 사간 집도 새로 지어 주어 살게 하라.’ 말만 들어도 벅차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구는 꽃님 아가씨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환상에 잠겨 있다가 ‘신분이 다른 나 같은 놈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야. 일찌감치 포기하 고 죽을 각오나 하는 것이 났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 선비가 여구의 상념을 깼습니다. “잘 가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꿋꿋하게 이기시길 바라오. 형씨에게 행운이 깃들기만을 간절히 바랄뿐이오.” “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내 것은 아니지만 왠지 선비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좋은데 쓰실 것으로 믿습니다. 여구가 품에서 동전꾸러미 하나를 조 선비에게 건넸습니다. 조 선비는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여구가 내미는 동전꾸러미를 받았습니다. 조 선비는 떡두꺼비 같은 두 손을 모아, 여구의 손을 감싸 쥔 채 힘차게 흔들었습니다. 여구의 손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작별인사를 나눈 후 조 선비는 말을 타고 계곡 길을 따라 황망히 달려가 버렸습니다. 계곡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바라보며 여구는 조 선비의 따뜻한 인간미에 감동 돼 흐르는 눈물이 쉴 새 없이 두 볼을 적셨습니다.
- 뻐꾹- 뻐꾸욱 - - 뻐꾹- 뻐꾸욱 -
솔바람에 실려 온 뻐꾹새의 울음이 여구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마음을 더욱 뒤흔들었습니다. 여구는 소지품을 하나하나 챙기며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떠날 때 열두 켤레를 삼아 봇짐에 챙겼던 짚신은 이제 한 켤레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참 서울은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천리 길을 고생고생하며 다녀왔으니 소득이 있어야 할 텐데 주인은 과거에 낙방하고 자기는 큰 죄 짐을 짊어지고 주인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게 가슴이 아팠습니다.
맥포리에 큰 경사가 났습니다. 여구와 꽃님 아가씨의 결혼 소식은 근동으로 좌악 퍼져 나갔습니다. 꽃님 아가씨와 여구의 결혼소문에 여구는 뭇 총각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은 “꽃님 아씨도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후 아버지가 과거에 떨어진 것에 대해서는 서운해 하였지만 여구와 결혼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역력했다는 거야.” “참 별일이 다 있구먼, 양갓집 딸이 자기 집 머슴하고 결혼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다니 어디 있을 법 한 일인가?”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지 않아, 같은 집에 살면서 정분이 들었던게 지.” “허기사 여구를 놓고 본다면, 인물 잘 났겠다, 영리하겠다, 일 잘하겠 다, 욕심 날만도 하지. 또한 처가가 부자이니, 재산을 잘 불릴 수 있 을거야.” “하여튼 잘 된 일이야! 이제 여구는 대복 터졌네.” 꽃님 아가씨와 머슴 여구의 결혼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번져만 갔습니다. 바람에 물결일 듯 온 고을을 술렁거리던 여구의 결혼식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녁때까지 검정 구름이 잔뜩 끼고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아침이 되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냇둑에 줄지어 선 능수버들이 밤새 내린 비로 목욕을 하고 햇빛을 받아 부시게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여구는 꽃님 아가씨가 새로 지어준 옷을 입고, 그 위에 단령(團領)을 착용하고, 쌍학흉배를 달고, 서대를 띠었으며, 사모(紗帽)를 쓰고 목이 긴 검은색 목화(木靴)를 신으니 그의 잘 생긴 모습이 돋보여 왕자와 같은 의젓한 품위를 풍겼습니다. 꽃님 아씨도, 무릎까지 닿은 두루치기 치마 위에 무지기를 입고, 밑단에 금박(金箔)을 넣은 붉은 색의 스란치마에 자주색 회장을 넣은 삼회장 노랑저고리를 입었습니다. 겉옷으로 활옷을 입고, 어여머리에 홍색사에 금박을 넣은 앞 댕기와 큰 댕기를 늘이고, 머리에는 칠보(七寶)족두리를 썼고, 구름무늬 수를 놓은 비단신을 신으로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예뻐 보였습니다.
여구와 꽃님 아가씨가 결혼을 하여 알콩달콩 잘 사는 사이 세월은 일년이 지나가버렸습니다. 그 동안 여구는 이 선비가 도적들에게 잃을 뻔 했던 재물로 더 많은 전답을 사들여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특히 주색잡기다, 노름이다 하여 재산을 축내기만 하던 이 선비가 없는지라 집안의 재산이 더 불어났습니다. 이처럼 꽃님 아가씨와 여구가 행복하게 살고 잇지만, 그들의 가슴 한켠에는 이 선비의 행방을 몰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과거에 급제를 안해도 좋으니 이 선비만 돌아오면 더 이상 남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꽃님 아가씨가 여구에게 말했습니다. “서방님, 아버지를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걱정이 되어요. 아버지가 안계시니 어머니가 기운이 없어 보여요. 또 한 어머니가 식사도 잘 못하시니,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어요.” 이 말을 들은 여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인, 그렇잖아도 장인어른을 찾아나서려던 참이었소. 얼마 후면 한 양에서 과거시험이 있습니다. 어쩌면 장인어른께서 거기에 나오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내일은 한양으로 떠날까 합니다.” “아버지를 찾으시려고 생각하셨다니 참 고마워요. 얼마 후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날 텐데, 아버지가 안 계시면 무척 서운할 것 같아요. 또 한 서방님이 우리 집안을 이렇게 잘 되게 한 것을 보시고, 아버지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꽃님 아가씨는 기뻐하면 불룩 나온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습니다. 꽃님 아가씨의 뱃속에는 꽃님 아가씨와 여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편 일년 전, 기생들과 술을 마시다가 깨어난 이 선비는 하도 갈증이나 물을 마시려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온 몸이 꽁꽁 묶여져 있는 것을 알고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영문을 모른 이 선비가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려 했으나 여구를 흠씬 때려주고는 주막에서 술을 먹은 것 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겨우 기생들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것까지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선비는 밤사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자신의 돈주머니를 찾았으나 달랑 돈 열 냥밖에 없었습니다. 이 선비는 낙심천만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괜히 술을 먹었구나. 여구란 놈만 옆에 있어도 내가 화를 입지 않았 을텐데. 여구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여서 나를 지켜줬을텐데, 괜히 죽이라고 글을 쓴 것 같구나.” 뒤늦게 후회한 이 선비는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그러나 이제야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선비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워 겨우 몸에 묶여진 줄을 풀고 누가 볼새라 황급히 주막을 빠져 나왔습니다. 한참을 달려 나와 어느 산길의 소나무에 머리를 찧으며 통곡하였습니다. 진심으로 후회하며, 지금껏 망나니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뉘우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했고, 비록 머슴이지만 여구에게 거짓말과 폭행만을 일삼은 자신이 후회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 선비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특히 여구의 옷에다가 여구를 죽이라고 글을 쓴 것으로 인해 무척이나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비록 머슴이지만 주인의 말을 한 번도 거스린 적이 없는 여구를 죽게 만들어 놓았으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소나무에 머리를 찧으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이 선비의 어깨를 감싸안았습니다. 이 선비가 울음을 수습하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며칠 전 한양에서 자신이 여구를 때릴 때 나타났던 그 청년 선비였습니다. 즉 양반의 서얼로 태어나 세상에 환멸을 느껴 세상을 떠도는 조 선비였습니다. “아니, 당신은 지난 번 한양에서 만나 그 선비 아닙니까?” 이 선비가 조 선비를 알아보자 조 선비는 “그렇습니다. 한양에서 한 번 뵈었지요. 그런데 무엇이 그리 슬퍼 통 곡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때 매를 맞던 그 사람은 어디에 갔습 니까?” 조 선비가 여구를 만나 주고 받은 말고 여구의 도포자락에 쓴 이 선비의 글을 떼고 꽃님 아가씨와 결혼하라고 글을 써 준 것에 대해 시치미를 떼고 이 선비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살아온 일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 선비가 조 선비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이 선비로부터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조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선비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습니다. “늦게나마 뉘우치니 참으로 훌륭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칠 때 가장 아름답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권력 과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이 선비님처럼 진심으로 뉘우치는 경 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을까요?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개보다 못합니다. 개는 주인의 말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집을 잘 지켜 줍니다. 그러나 나는 가족과 이웃과 이 세상을 위해 쓸만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덕을 쌓지 못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는 인간입니다.” 조 선비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이 선비의 손을 따스하게 잡으며 “허허, 됐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 덕을 쌓으십시오. 장자께서 말씀하시길, ‘덕을 쌓으면 권력과 재물이 부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덕을 쌓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고 하셨습 니다. 이 선비님은 이제 그걸 깨달았으니 가난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제야 이 선비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 선비에게 편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고맙습니다. 선비님. 젊은 선비님께서 미혹한 저를 깨우쳐 주시니 힘 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그간의 과오를 씻기 위해 남을 위해 일을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세상을 떠돌다보니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마침 제게 돈이 약간 있습니다. 이 재물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도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이 돈을 가지고 굶어죽 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주십시오.” 조 선비는 이 선비에게 여구로부터 받은 돈을 이 선비에게 건넸습니다. 이 선비는 그 돈이 자신의 돈인 줄도 모르고 엉겁결에 받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그 돈을 조 선비에게 돌려주려 하는데, 어느샌가 조 선비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날로부터 이 선비는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 전해주곤 하였습니다. 때로는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받은 품삯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돈이 없어 병으로 죽게 된 사람들에게는 약값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일년여 동안 이 선비는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는 뜻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과 힘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세상의 욕심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거지같은 행색으로 세상을 돌아다녀도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 선비가 한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양에 이르르니 일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여구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자신이 기생들과 술을 마셨던 주막 앞을 지나갈 때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확 달아왔습니다. 그때 낯익은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조 선비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이 선비는 조 선비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행장을 보니 일 년 동안 고생이 많으셨군요.” 조 선비의 말에 이 선비는 정색을 하면서 “아닙니다. 모두 제 업보입니다. 이렇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자 조 선비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 선비님, 내일 과장에 나가십시오. 일 년 동안 충분히 뉘우치시고 좋은 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에 나가셔서 더 좋은 일을 많이 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면 그 뜻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이 선비는 처음에는 조 선비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 동안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과거시험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거에 급제해 백성들을 잘 다스리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는 탐관오리를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뼛빠지게 일해 농사를 지어놓으면 온갖 명목으로 곡식을 빼앗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굶어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래서 보릿고개라고 부르는 봄철에는 마을마다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세상 구경하면서 참혹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실정을 가슴 아프게 바라본 이 선비는 백성들을 편안하고 배불리 먹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꼭 과거에 급제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생각에 잠겨있는 이 선비에게 조 선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반드시 과거에 급제해 훌륭한 목민관이 되십시오. 이 선비님은 덕을 쌓은 분이니 틀림없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날 이 선비는 과장에 나갔습니다. 팔도의 선비들이 뜻을 가지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모두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마을을 가다듬었습니다. 이윽고 과거시제가 내려졌습니다. 시제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가난해도 외롭지 않고, 이것이 있으면 부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비는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 이맘 때 만난 조 선비가 말해준 것이 과거시제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덕(德)’을 쌓는 일이란 것을 이 선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조 선비가 나타나 ‘덕을 쌓는 목민관’이 되라고 하였기에 그것이 도자의 말씀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선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선비들도 먹을 갈며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한참 만에 먹을 간 후 이 선비는 ‘덕은 사람의 근본이다. 밥 먹는 것도 덕이며, 숨쉬는 것도 덕이며, 자 식을 기르는 것도 덕이며, 부모를 공양하는 것도 덕이다. 사람이 덕 을 쌓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가난해도 부자와 같다. 그러나 덕이 없으면 미물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덕을 지녀야 한다.’ 이렇게 답안을 쓴 이 선비는 답안지를 시험 감독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다음 날 과장에 나가보니 많은 선비들이 과거급제자 명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벽에 과거급제자들의 명단이 붙여졌습니다. 아, 그런데 이 선비 이름이 맨 위에 보였습니다. 장원급제를 한 것입니다. 이 선비는 너무 기뻐 눈물이 났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한 세월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선비가 기뻐서 눈물을 흘릴 때 장인이 된 이 선비를 찾으러 온 여구가 나타났습니다. 여구는 글을 몰라 이 선비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이번에도 이 선비가 떨어진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선비에게 다가가 위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이 선비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구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선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비볐습니다. 틀림없이 여구였습니다. 여구가 죽지 않고 살아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구야, 미안하다.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고맙구나. 나를 용서해라. 내가 이렇게 과거에 장원급제한 것은 그동안 못된 주인의 말을 묵묵 히 들으며 온갖 궂은일을 당한 너의 깨우침 덕분이다.” 여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다니, 그것도 장원급제를 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곧이어 이 선비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벼슬을 받았습니다. 큰 벼슬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고장인 무안현감으로 제수해주기를 임금님께 간청해 무안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무안땅 현감이 된 무안백성들을 평안하게 살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비는 금의환향하여 무안고을을 잘 다스렸습니다. 이 선비가 무안고을을 너무나 잘 다스려 무안 백성들이 이 선비가 오랫동안 무안고을을 다스려 주기를 원해 오랫동안 무안현감을 지냈습니다. 여구도 장인이 된 이 선비를 잘 모시고 꽃님 아가씨와 다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제 이 선비와 여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사람이 덕을 쌓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를 보여준 이야기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