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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 민제 박임상

작성일
2015.12.10 17:10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083

민제 박임상은 애한정 박익경의 13대 손으로 1864년(고종 1년)에 현경면 평산리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어른스럽고 학자적 풍모를 지녔었다.
박공의 모친 김해김씨가 아직 시가로 우귀하지 않고 친정인 청계면 태봉리에서 묵고있을 때 태봉 뒷산인 태산의 산신이 꿈에 나타나는 기이가 있었는데 그 때 마침 선생의 부친인 북암공 기준이 처가에서 머물고 있을 때라 그 꿈이 훌륭한 학자가 될 태몽이었다 한다.
또한 박공은 글읽는 소리가 유창하고 발음이 정연하여 훈장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부친인 북암공이 앓고 있을 때 가난한 집안이라 낮이면 나무를 하여 약을 구해오고 밤이면 글을 읽는데 그 부친께서 나는 너의 글읽는 소리만 들으면 내 병이다 나은 것 같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 그는 과거를 보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일을 기약하였으나 모든 환경이 선생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일찍이 최면암 선생이 민제라는 아호를 내려 주었고 기송사가 민제기(아호의 내용을 기록 하는글)를 지었으며 유기일, 오계수, 홍재구, 오준선 제현과 더불어 도의교를 맺고 교류하던 중 북부도사의 직함이 내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향리에 건립한 계산제(서당)에서 후학을 교도하니 학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이 지방의 문풍이 더욱 진작되었다. 국운이 쇠퇴하여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겸하여 단발령이 내리니 이에 반대하는 국민의 소리가 곳곳에서 높아 질 때 마침 최면암과 기송사 두 선생께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자는 격문이 본지에 도착하자 민제 박공께서는 의기남아가 국모의 원수를 갚고 무도한 왜놈을 쫓아 버릴 때가 왔다고 외치며 제자 수십명을 규합하여 철리사 모임에 참여하여 “저 왜놈과 같이 한 하늘에서 사는 것도 부끄럽거능 하물며 머리를 깍고 저들에게 변을 당할 것이냐!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고 죽을 지언정 머리를 깍고 살지 않겠다.”하며 서약서에 서명하고 전열에 참여하였는데 고종황제께서 해산하라는 명령에 부득히 해산하여 귀향 하였다가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최면암 선생이 다시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박공은 동지 수명과 함께 순창으로 북진하다가 면암 선생께서 왜병에게 붙잡혀 갔다는 비보를 듣고 “하늘이 우리를 버리는 구나”하면서 하향하였다.
최면암 선생이 적지 대마도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시니 심상 3년(마음속으로 복을 입는 것)을 마치고 이 나라 선비의 맥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김병렴, 나유영, 노연백 등과 함께 김중암 선생의 유지배였던 지도두류에 단을 설치하고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등 네 스승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이어 기송사와 선배 동지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니 박공은 뒤를 이어 제자들을 기르면서 만년에 평천정사를 건립하고 여생을 보냈다.
박공은 최면암과 기송사 선생의 사우를 건립코자 부지를 다듬다가 왜경에게 발각되어 뜻을 못 이루고 8·15 해방을 앞둔 1944년에 그 아들 현풍에게 두 선생의 사우를 꼭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으니 박공의 제자들과 자손이 합심하여 9일장으로 예장하고 곧이어 평산사를 건립하고 면암, 송사 양 선생을 봉안하고 2년 후에 민제 박공을 배향하여 오늘날 도내 유림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현경면 평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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