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충의 - 관란제 노공 연백

작성일
2015.12.10 17:08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951

노연백은 구 한말 이 고장의 기개높은 선비로 존경을 받았으며 선현을 모시고 후학을 기르며 불우한 자를 돕고 스승과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한 덕행을 오늘도 모든 사람의 가슴에 사무치고 있다.
노공 연백의 호는 관란제이며 본관은 함평으로 1849년(현종 15년)에 해제면 백학산밑 신사리에서 제갈공명 선생의 현몽울 받고 노계탁과 전주 이씨 부인의 사이에서 탄생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빼여나고 울음소리도 집안을 들썩들썩하게 하더니 생후 3주일이 못되어 이가 나고 몸을 뒤집어 모두가 특이하게 여겼다.
또한 천재적 재능이 있어 5살 때부터 수십자의 글씨를 외웠으며 7살 나던 여름에는 행인 한 사람이 옷깃을 풀고 가슴을 드러내 보인채 마을 앞길을 지나가자 그 행인을 불러 “양반이면 옷깃을 함부로 헤치지 않는데 당신은 옷깃을 헤치고 가니 필시 상놈이로군” 하고 꾸짖으니 그 행인이 어린 노공 앞에 와서 잘못되었다고 사과하니 이를 지켜본 노인들이 아무개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 한다.
이렇듯 기질과 재능은 탁월 하였으나 너무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매철마다 열리는 서당엘 다닐 수 없어 낮에는 일을하고 밤에는 동냥글을 읽던중 일찍 아버지를 여의게 되고 그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초상범절을 예도에 따라 거행하고 3형제가 한결같이 우애로써 어머님을 모시고 근검절약을 신조로 가산을 늘려 중년 시절에는 상당한 부유층이 되었으나 교만 하거나 낭비하는 일이 없고 항상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학문을 크게 넓히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마을에 서당을 세워 스승을 맞이하였으며 서적을 구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식량을 저축하여 아들과 집안 조카, 고을 자제들을 가르치느등 육영 사업에 전념하였다.

공은 늦게 학문을 깨우치고자 면암 최익현을 뵙고 미쳐 깨닫지 못한 성학의 요지를 깨치고 최운제(면암 선생의 아들), 기성사, 송시제, 제현등과 도의교를 맺었으며 노악은공(고려말 충신, 두문동 72인중 한사람)과 노금계공(임진난때 공신) 두 분의 사우를 나주에서 현 위치인 해제면 신사리로 옮겨와 학산사를 건립하여 제향을 모시게 하였고 그 곁에 관란제를 지어 호서, 호남의 선비를 모아 향음주례를 베풀었으며 고종 33년에는 지도향교를 건립하는데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고 장성의 사산사(공자님을 모신 서원)에도 논두마지기를 제전으로 바쳤으며 지도의 두류사현단(이화서, 기노사, 김중암, 최면암)의 위패봉안과 제항에도 옳고 그름을 밝혀 사론을 하나로 귀일 시켰을뿐만 아니라 당시 남도의 석학이었던 동해 김훈 선생의 문집을 노공이 사재를 들여 발간 하는 등 어진 이를 사모하는 정을 다하였고 가뭄의 대명사인 무자년의 흉년에는 곡간을 털어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한 사람도 굶게하지 않은 훈훈한 인정을 보이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협심이 강한 노공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던중 송사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김동해와 함께 장성으로 달려가 의병을 참여하였고 을사보호 조약이 성립되자 노성 궐리사에 최면암 선생을 찾아가 국권회복에 서약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다가 왜병에개 붙잡혀 곤욕을 받기도 하였으며 1906년에 최면암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때 노공에게 “일찍 그대와 의리를 논의했을 때 그대야말로 위험이 다다를 때 이를 붙잡아 줄 인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네 우리 서로 뜻을 합하여 애끓는 심정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죽어도 가히 눈을 감겠네”라는 서신을 보내니 노공은 분연히 일어나 “하늘 가득한 풍우는 밝은 날이 아득하고 초야에 묻힌 외로운 신하는 눈물로 옷을 적시네 다행히 우리 스승이 이 나라의 지주로 계시니 우리들은 죽도록 뫼시며 그 뜻을 어기지 않으리라”라는 시를 읊고 순창까지 달려 갔을 때 최면암 선생이 왜병에게 끌려가고 있어 남문밖 정거장에서 스승과 고별 하면서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되었고 경술년 나라가 망하던 날엔 뒷산에 단을 쌓고 북녁하늘을 우러러보며 슬피 울었다. 고종 황제가 돌아 가셨을때나 탈상 때에는 거동을 하지 못하면서도 가마를 타고 뒷산에 올라가 슬피우니 모두가 그 의리 애국충정에 감탄하였다 한다.
공이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려 할 때 온 집안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리를 위해 살것이며 학산사 보존에 온 정성을 다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하니 공이 가시는 길을 메운 조객들은 모두가 아쉬워 해 마지 않았다. 후일 무안 유림의 뜻을 모아 학산사에 배향하고 노공의 위업을 흠모하고 있다. <해제면 신사리>

담당부서
관광과
061-450-5474
  • 조회수 397,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