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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 사간 박기종

작성일
2015.12.10 17:06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266

이 나라에는 역사적 인물 중 탐관오리도 많았지만 청백리도 가끔 있어 선비의 도를 지키고 민속적 양심을 견지해 오면서 수천년 사직을 지켜 온 숭고한 정신들이 있으리 그 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의 등불이며 길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장에서도 벼슬 길에 오른 분이 많지만 정의와 인도주의적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 정성을 다 바쳐 당시에나 후세의 추앙을 받고있는 분 중에 사간원 사간을 지낸 죽포 박 기종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박사간은 1824년(순조 24년)에 무안인 애한정 박 익경공의 12대 손으로 무안읍 고절리에서 태어났는데 박사간이 태어날 때 마을 뒤 보평산이 세번이나 울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박사간은 6세 때부터 글을 읽었다는데 글읽는 폼이나 행동이 어른스러웠고 천하의 대효자라고 칭하였던 순 임금께서 계모와 이복 동생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그 계모를 존경하고 동생을 사랑했었다는 글귀를 대할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그렇게 할수 있겠는가하고 자기 반성에 도취되었다 하니 그 인간성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이 15세 안에 사서오경과 제자백과서를 두루 다 읽고 16세 때에 아버님의 명을 따라 과거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도사 정규에게 사서를 재독하고 홍사간 경섭에게서 삼경속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전수받으니 호남땅에서 글읽는 선비들이 그와 앞을 다툴 수 없었다 한다.
이렇듯 학문이 일취월장하는 동안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님마저 병환에 신음케 되니 사간께서 손가락을 잘라 어머님의 기력을 회생시키는등 갖은 효성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죄인이라 하여 이를 내놓고 웃지 않을 뿐 아니라 탈복할 때까지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복을 벗은 뒤에 홍매산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이기의 학설을 연마하고 우주간의 이치를 터득하니 홍매산 선생께서의 아름다운 선비라고 하며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학문이 크게 뛰어나니 아버님의 소원을 풀어 지하에서나마 편안하게 해야 하겠다는 심정으로 1861년(철종 12년)에 식년시 문과에 합격하여 가주서로부터 출발하여 승문원부정사 지경묘벌 겸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대동찰방, 성균관직강, 사헌부장령, 사간원사간등의 벼슬을 지내면서 어찌나 청렴하고 품행이 단전하며 사리가 밝고 언론이 바르던지 임금이나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한다.
박사간이 벼슬을 하는 동안 수 없는 일화가 많으나 대강 간추려보면 대동찰방을 지낼 때 폐역이 되다시피한 역을 중홍 하기 위하여 우선 역졸들을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사랑을 베푸니 사물처럼 여기고 무엇이나 자기 집으로 가져 가버리던 습성을 바로잡고 옛날의 역 보다도 더 훌륭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역졸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인근 주민도 옳은 찰방을 만났다고 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던 이유승이라는 암행어사가 역사에 들려 여러가지를 살펴 본즉 과연 소문대로인 박공의 손을 잡고 칭찬해 마지 않았으며 이유승 암행어사와 평양감사 한계원이 나라에 장계를 올려 박공을 이 자리에 연임해 줄 것을 청하여 이기를 지냈는데 그 지방민이 송덕비를 세우면서 박공 같은 분만 찰방으로 오기를 기다렸다한다.
또한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는 이조정랑으로 마침 고향에 내려와 있게 되었는데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곧 바로 서울을 올라가 화성(지금의 수원)에 이르러 적이 퇴각했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는데 시종하는 사람이 이제 적이 물러 갔으니 다시 내려감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아뢰니 박공께서는 크게 꾸짖고 곧 바로 숭례문에 다달으니 오경(한밤중)이어서 그 다음날 궐문 밖에서 하례의 인사를 올렸다.
또 장령으로 있을 때 시폐(시국의 폐단)를 바로잡을 상소를 올리면서 국가의 개척과 백성의 걱정을 덜어줄 시급한 문제와 과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임오군란때 임금님 앞에나가 옮은 말로 진언하니 임금이나 상하 동료가 다 찬탄해 마지않았다.
이 자리에서 공은 명성학(성인의 학문을 밝히자), 진기강(기강을 바로 잡자), 수군정(군정을 굳건히 하여 국방력을 키우자), 조운사(국세 운반제도를 수정하자)등의 6개 항에 달하는 시무책(당시 해야 할 계책)을 진언하였다 한다.
갑신정변 때에는 밤중에 갑자기 화살과 돌이 궁전 앞에 비오듯 쏟아져 이를 막고 문앞에 나오니 문이 굳게 닫혀져 있어 담을 뛰어 넘을 수도 있었으나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 동분서주하면서 궁전의 위급함을 막아내니 후에 고종께서 크게 치하하였다.
벼슬길에 있을 때 이처럼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전념했지만 집안살림은 보통 농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부인께서는 길삼과 밭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모든 부인들이 더욱 부지런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뇌물로 벼슬을 사는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유력한 권력층에게 받치지 않으면 당상관이 될 수 없는지라 문중에서 돈을 마련하여 상납하고자 하니 박사간께서 이 말을 듣고 크게 꾸짖으며 사대부가 벼슬이 높아야만 사대부냐 정직하고 불의와 타협않고 옳고 바르게 살아 가는 것이 사대부의 본분인즉 그러한 불의스러운 생걱을 버리라 하여 뇌물 바칠 뜻을 포기하게 하였고 재직시 9회에 걸친 상소는 구구절절이 정의감에 불타 있다. 67세 되던 해에 벼슬을 내놓고 하향하니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병시공께서 박사간은 심단발백(마음은 붉고 머리는 희다)이라는 글을 써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하니 모든 동료들이 섭섭해 했다.
박사간공은 위선사업과 육용사업에도 남다른 성의가 있어 우선 그의 선조였던 면남공(고려때 정승)의 유적을 살리고자 유산정이란 정자를 중건하여 유덕을 기리니 이 유산정은 이 곳의 명승지로 유명하며 또 문규를 바로 잡고 제사절차등 예의범절을 교화하여 벽지낙촌인 이 고장에 새로운 문물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니 유교의 유풍이 진작되었다.
박사간이 72세때 본 도 관찰사 이 도재가 찾아와 친교를 맺고 영암 나주의 여러섬에(지금의 신안군 일대) 읍을 설치할 것을 부탁하니 관찰사께서는 섬의 지형과 백성들의 산업등을 박사간에게 물어 보므로 공을 읍터는 지도에 설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진언하여 지도군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박사공의 일생을 좁은 지면에다 기록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벼슬길 30여년에 초가집 그대로에 전답 한 마지기 불어나지 않고 의리와 학문만을 유산으로 남겼으며 권문세가에 아첨하지 않고 오직 정직하다고 일컬은 김 병시 정승과 이 용원 판서, 한 장석 판서와의 친교를 맺고 국사를 논의 했다고 하니 그 정신이 얼마나 고결하였는가를 살필 수 있다. 공의 문집 4권에 공의 정신과 학문과 혼이 담겨 있으며 1961년에 무안읍 고절리에 있는 병산사에 추배하고 얼을 되새기고 있다. <무안읍 고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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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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