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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 초의대사(장의순)

작성일
2015.12.10 16:56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157

대각등개보제존자초의대종사는 조선 정조 십년(1786, 병오) 사월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왕산리에서 태어났다.
성명은 장의순이며 스님의 자는 중부자이니 초의는 점화지호이다. 또 호하기를 해옹 또는 해사, 해로사, 해양후학, 해상야질인, 후사, 자후, 일지암이라고 했다. 스님의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다섯살(1790년)때에 강가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열 다섯살이 되던 해에 전남 나주군다도면 운흥사로 찾아가 벽봉 민성 스님께 의지해서 중이 되었다.
이곳에서 불경을 익히고 있다가 열 아홉살(1804년)이 되던 해에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 갔다가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문득 바다속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깨우친 바 있어 가슴에 맺힌 것이 시원하게 풀리니 가는 곳마다 별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후 해남 대흥사에 와서 완호(대흥사 제9대 강사)스님을 뵙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초의라는 호도 이때에 받은 것이다.
초의선사는 선과 교의 양면이 두드러지게 발전했던 대흥사의 법풍을 수용 전승한 인물임을 찾아볼 수 있고 초의가 제작한 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의집 2권 초의시고 2권2책 동다송 1권 다신전 1지암귀고와 진묵조사유적고가 있으며,
또한 선에 관계된 저술로는 사변만어와 선과가 두드러진다. 이중에 초의의 한결 같은 수선공부는 두륜산 산마루에 일지암을 세우고 독체에 홀로 앉아 40여년을 고집스럽게 지관 수선하면서 선과 교를 함께 전수해 왔던 것이 드러난다.
스님은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경전을 배우면서 범자를 익혀 거로의 뜻을 통하고 또한 탱화를 잘 그려서 당대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께서 남기신 신상이 많은데 현재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신상이 두폭이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단청도 잘 하셔서 조사 스님들을 모신 대광명전과 보연각을 짓고 손수 단청을 해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선여에 익힌 글씨는 일가견을 이루어서 뛰어났고 특히 예서를 잘 쓰셨다.

추사 김정희와 평생에 지음이 되었으나 추사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별개의 글씨를 썼다.
스님이 24세(1809년)때에 강진(다산초당)에 와서 유통생활을 하던 다산(정약용) 선생과 만나 깊이 사귀면서 다산에게서 유서와 시학을 배운 후에는 교리에도 정통하고 선리에도 밝아 선경에 들어 운유의 멋이 있었다. 그 이태 후에 다산 선생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에 들어가 일박을 하면서 월출산 외경을 그려서 백운도라 명하고 다산이 그린 것은 청산도라 이름하였다. 다시 발문을 윤 동이 부치고 또 시를 지어 달아서 한폭의 시축도를 만들었다.
서른살(1815년)때에 처음으로 서울에 가서 추사(김정희) 산천(김명희) 금미(김상희) 형제와 다산선생의 아들 서산(정학연) 운포(정학유) 형제 신자하, 홍현주 등과 교유했다. 38세(1823년)때에 대둔사지를 편찬을 하였으며 이때 12대종사와 강사를 추대하여 모시고 다산에게 부탁해서 사지를 필사했다.
39세에는 일지암을 중건하여 은거지로 삼았다. 스님은 이곳에 선의 논지를 밝혀 초의선과와 선문사변만어를 저술했고 또 다문화 부흥을 위하여 동다송과 다신전을 썼으며, 이밖에도 많은 시서와 잡문을 남겼다.
오십세(1835년)때에는 소치(허 연)가 일지암으로 찾아와 제자가 되어 시, 서, 화, 다를 삼년간 배웠다. 55세(1840년)때에는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개보존자초의대종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스님은 호남팔고 중에 한분으로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종이 소치에게 묻기를 「호남에 초의라는 승이 있다는데 그 지행이 어떠한가?」하였다. 소치가 답하기를 세상에 고승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가 많습니다라고 했다.
이듬해 (56세)에는 스님께서 시주하여 대광명전과 보연각을 신축하고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12대종사와 강사 그리고 역대 조사와 고승대덕 172분의 진영을 그려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모시도록 했다. 이때 추사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일로향실」이라는 다실 현판을 써서 소치편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쉰 여덟살(1843년)이 되던해 백발의 늙은 몸으로 고향을 찾아 갔다가 폐허가 된 집과 잡초만 우거진 부모님의 묘소를 돌아보고 눈물로 시 한편을 지어서 놓고 돌아왔다. 귀고향 고향 떠난 사십년에 돌아오니 백발이 성성하네! 마을은 풀섶에 덮어지고 집은 간데 없어! 옛 무덤엔 이끼만 가득하고 발자국마다 수심고이네! 중심을 잃었는데 한은 어디서 생기는지! 피가 말라 눈물도 흐르지 않네! 외로운 중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수구초심이란말 부질없구나! 라는 시 한 구를 소개하였다.
71세(1856년) 10월달에는 금란교계를 42년 간이나 깊게 맺어오던 추사 김정희의 영전에 제문(원호 김공제문) 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일지암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시 짓는 일도 즐기지 않고 조용히 살며 말년을 보내다가 봉은사에서 대교(화엄경)를 간포하는 일에 증사의 일을 당하였고 달마산 미황사에서 무량전을 짓는 모임에 주선의 자리에 모셨었지만 어데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리하여 줄곧 일지암에 주석하셨는데 하루밤에는 몸져 누우셨다가 시자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해서 가질좌(도사리고 앉음)를 하시고 홀연히 입적하시니, 그때 나이는 81세요 법랍은 65세로서 고종 삼년 팔월 이일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해우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나시어 어둡고 어지러운 정치정세는 배불정책으로 승려와 가까이 지내면 출세에 지장이 있었음에도 권문세가(당시 현직 이조판서 조노경)의 자여질과 다산선생 등으로 종유한 일들은 초의 스님의 참모습인 중도사상을 실천하는데 녹유하였으리라 믿어지며 고를 초월하는 논리에서 보듯이 세상 사람들이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구하려고 하지만은 부처님은 괴로움속에 뛰어들어 괴로움을 행하고 괴로움에 빠져 있는 중생을 제도한다는데 그 차이점이 있음을 논증합니다.
이것은 초의 스님의 자신의 독백이요 수행을 통해서 터득한 경지요 서원임을 알 수 있는바 이 고장이 낳은 선승 초의에 대한 연구와 현창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란다. (초의선사 현창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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