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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 화설처사 류윤

작성일
2015.12.10 16:47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914

무안읍에서 목포 방향으로 약 4km의 국도를 달리면 바로 도로 우측에 아담한 마을이 있으니 즉 화설처사가 살다간 화설당이다.
화설당은 화설처사의 당호인데 그 당호가 마을 이름으로 바뀐 것이라 전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화설처사의 조부되시는 류자씨가 이 마을에 낙남하여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하청천이라 하였으며 그 손자이신 화설처사는 재주가 비범하고 기품이 당당할 뿐만 아니라 학문과 시문에 능하여 강항선생, 박남곽선생, 유시남선생등 당대 석학들과 교류하였고 말년에는 송시열선생에 이 화설당에서 머물다 가니 문명에 뒤진 이 고장의 문풍을 진작시킨 공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류처사는 마을 어구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뜻에 맞는 벗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인생을 즐겼고 고기를 낚는지 세월을 낚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정자의 이름이 없고 그저 글방으로 찾아오는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그 문화에서 훌륭한 선비가 많이 나와 그 이름이 향방에 널리 알려지니 무안 현감으로 부임하는 원님은 의례히 이 정자를 찾아 류처사를 뵙고 여가가 있으면 이곳으로 놀러와 시를 읊었다. 그래서 유시남 선생과 박남곽 선생도 무안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놀게 된 것인데 유시남 선생이 무안 현감으로 있을 때 마침 송우암 선생께서 숙종 때 세자책봉 사건으로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상경도중 그의 친우인 유시남이 무안 원님으로 있다는 말을 듣고 유시남을 찾으니 유시남께서 송우암에게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러우니 좀 한적한 곳에서 쉬어감이 어떻겠는가”하고 의향을 묻자, 송우암께서 “이런 시골에서 어디 쉬어 갈 곳이 있겠는가”하고 대답하자 “내가 처사 한분을 소개해 주지”하고 류처사에게 안내하게 되었고 두 분이 연령차이는 있지만 심기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곳에서 머물게 되니 류처사께서는 자가의 시녀를 송우암에게 주어 고적을 달래게 했다.
하루는 유시남등 여러 선비가 찾아 왔을 때 정자의 당호를 송우암에게 청하니 때는 초봄이라 활짝 핀 매화꽃을 마치 눈송이 같고 그 아래 호수가의 동백은 붉게 물들어 있어 가히 꽃과 눈으로 덮힌 설경 같은지라 즉석에서 화설당이라 이름하고 곧 사람을 시켜 칡뿌리를 캐 오도록하여 이 칡뿌리로 붓을 만들어 초대형의 액호를 ?고 그 액호가 지금까지 현판되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화설처사가 가신지 350년의 세월이 흘러 집이 퇴락해져 후손들이 몇 차례의 중수를 하면서 원형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나 아름드리 모과나무로된 기둥 네개가 현존되어 당시의 웅장한 정자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청계면 사마리>

담당부서
관광과
061-450-5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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