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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 노촌 임상덕

작성일
2015.12.10 16:42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110

네살때 글을 읽기 시작하여 15세 전후에 경서와 사기와 백가제서를 통달하고 17세에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고 23세에 증광시에 합격하여 그 이름을 국내에 떨쳤을 뿐 아니라 그 꿋꿋한 정신과 해박한 식견은 노사숙유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 젊은 지사 임상덕은 나주임씨로 1683년(숙종 9년)에 몽탄면 이산리배뫼 마을에서 임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고조이신 황해도 관찰사 임 서의 뒤를 이으고자 백부인 임세온의 양자로 입양하였다.
자를 윤보라 하고 호를 노촌이라한 임공은 증조 승지공 연이 건립하고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노딜던 식영정(몽탄강 언덕위에 세움)에서 글을 읽으며 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어찌나 총명하고 영특한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했고 나주, 회진 근방에서 재동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저 식영정까지 찾아 왔다하니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가 짐작이 된다.
23세의 나이에 증광시에 합격한 임공은 예에 따라 전적을 제수받았고 병조좌랑으로 옮겼으며 또 정언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 지평이 되어서는 조정안에 벼슬아치를 쇄신코저 청렴과 의리를 펴니 평소 아부아첨으로 출세하려던 벼슬아차들이 부끄럽게 여겼다 한다.
공이 또 병부좌랑에서 사서로 옮겼다가 호남지방의 관기를 확립하기 위해 전라우도의 경차관이 되어 당시 어지러웠던 조창(나라의 세금을 거두었다가 뱃길로 서울로 옮겼는데 옛날 세금을 모아둔 창고)의 오래된 폐단을 바로 잡으니 아무런 세도가도 공의 당당한 의기 앞에는 머리를 숙였다.
공이 다시 수찬, 교리, 헌납 겸 사서 되어 서학의 교수와 교서를 거쳐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남평 현감이 되었는데 그 때는 이미 호당에 뽑히게 되어 이조좌랑 겸 사서되어 조종에 들어가니 조정이 소란하여 옳은 대신들을 무너뜨리고 아부아첨으로 임금을 혼미하게 할뿐만 아니라 당쟁이 날로 심하여 공은 이의 시정을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이 임금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한 때 그 자리에서 교체되었다가 다시 옥당과 전랑에 제수되었고 호당에 들어가 응교가 되어 임금께서 초모(돈피로 만든 사모관)를 공에게 하사하니 초모의 하사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이 경연관으로 있을 때 글을 외우고 뜻을 설명하는 품이 격렬하고 간결하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또한 성 곁에 있는 집들을 철거할 것을 임금께 권할 때도 모든 사람의 의견이 통쾌하게 결정되어 상하간에 공을 우러러 보는 사람이 많았었다.
그러나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 시급하게 해야할 일들을 임금께 상소하고 이어서 벼슬을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면서 다시는 조정에 돌아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부모님과 식솔들을 위하여 진산 군수가 되었는데 그 때 군자감정의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고 다시 능주 목사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돌림병을 얻어 갖은 의약의 바람도 없이 서른 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으르 뜨니 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이 영특한 재질과 늠름한 기맥으로 모든 선비들의 귀감이었던 노촌 임공이 더 많은 천수를 얻었던들 그의 포부를 크게 펴 나라와 민족에게 큰 공을 세웠을 것을 너무도 짧은 삶을 안겨준 하늘이 무심할 뿐이다. 공이 가신 후에 그가 남겨놓은 시문을 엮에 4권의 문집을 만들었으며 그 문집중 동사회강은 후학자들의 역사학 공부에 큰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몽탄면 이산리>

담당부서
관광과
061-450-5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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