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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 동리공 임의

작성일
2015.12.10 16:37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900

일신의 영욕과 가문의 번창을 위해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은 사람마다 지닌 본능이라 할 수 있으나 이를 초연히 물리치고 오직 평민으로서 맑고 깨끗한 인생을 살다 간 분이 있으니 이가 곧 동리공 임위이다.

본관은 나주임씨인 공은 1597에 승문원 정자 벼슬을 지낸 임복의 손자로 태어나 사계 김장생 선생에게서 수업을 받고 부모의 명에 따라 과거시험에 응하여 일차시험에 합격하고도 복시에는 응하지 않아 그 부모도 공의 성품을 알고 더 이상 권하지 않으니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인조 초에 상의원별좌와 경양찰방과 위사시직을 제수받고 부임을 사양하려 하자 공의 모친께서 왕명을 거역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므로 부임하여야 한다는 강권에 못이겨 경양찰방에 부임한지 2개월만에 찰방직을 버리고 돌아왔으며 그 후 효종대왕께서 북벌의 큰 뜻을 펴시고자 유일지사(숨어있는 선비)를 크게 기용하면서 공을 형조좌랑에 제수하고 이이서 의금부도사, 익위사사어, 사헌부감찰, 공조정랑 등의 벼슬을 주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산림에 묻힌 선비의 대표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한다.
그 후 현종때에 공의 학문과 지조를 가상히 여기고 사헌부지평에 제수하고 사령을 보내었으나 공은 이미 죽고 없었다. 이렇듯 공은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맑고 깨끗한 지조를 지키다 갔으니 부귀영욕에 눈이 어두워 아세곡직하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공은 돌이 못되어 부친을 여의었고 호서지방에 대피하다가 5세때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모친에게 부친의 묘소를 물으면서 흐느껴 울었으나 모친은 항상 슬픔에 젖어 있으므로 이웃 사람을 찾아가 슬피 울곤 하였다. 또한 언제나 어머님의 물러서라는 명을 받고서야 자기 침실에 들면서도 몰래 어머님이 잠드시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잠을 이루었다.
이는 그 형인 타가 각 고을의 관장으로 타향에 있는지라 공이 모친을 모시었고 또 어머님이 병환에 누었을 때 어느날 하루는 깜박 잠이 들었는데 돌연히 심장이 뛰고 몸에서 땀이 젖고있어 깜짝 놀라 어머님에게 달려가 본 즉 어머님의 병세가 위급해 있어 곧 약을 드리니 회생되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자간의 기맥이 한가지로 통한 이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님이 풋과일을 원하나 생명이 위독하여 과일을 구하는 동안 돌아가시게 될 것 같아 공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우리 어머님을 며칠만 더 살게 해 주소서”하고 미친듯이 울부짖으니 과연 10여일을 더살게 되어 그 과일을 드릴 수 있었다 한다.
또한 공은 그 형님을 엄부와 같이 받들면서도 어찌나 우애가 좋았던지 2, 3일도 못 되어 안부서신이 오갔으며 그 형인 상주공이 퇴관 후로는 사서오경의 깊은 뜻을 논의하며 늙음을 즐겼다 한다. 공이 어렸을 때의 일화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정자나무 밑에 누웠었는데 큰 뱀에 아이들은 모두 도망하는데 공은 움직이지 않고 그 뱀이 지나간 뒤에야 일어나니 모두 어쩌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느냐고 묻자 “내가 가만히 있으면 뱀은 나를 해치지 않고 지나가지만 뱀이 배 위에 있을 때 움직이면 나를 물 것이 아니냐” 하였으니 어려서부터 어진사람의 기질과 도량을 갖춘 것이 아니더냐. 이와 같이 어머님께는 효자요 형제간에는 지극한 우애로서 세상의 영화를 멀리하고 고결하게 살다가니 지금도 영욕만 일삼는 사람을 보면 임 동리공의 묘소에 가서 그 비문이나 한번 읽어보고 오라고 할 정도로 영역을 탐내는 자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삼향면 유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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