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 - 박익경
- 작성일
- 2015.12.1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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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한정 박익경 애한정은 박익경의 호이며 자는 필보이고 무안 고절리에 터를 잡은 무안박씨 무안파의 입향조로 1438년 (세종 50년)에
한양의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문장과 도학이 세상을 울리어 당대의 명현들과 교류하였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부친 평강군수공께서 사랑하여 마지않았다 한다.
단종때 효자로 천거되어 정릉참봉을 제수받아 봉직하였는데 그때 박평년, 성삼문,유응부 등과 유별나게 친히 교류하였고 특히 성삼문 선생과는 사돈간의 인척으로 더욱 친하게 지냈다.
단종이 물러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 많은 선비들이 세조의 행위가 옳지않다 하여 단종 폐위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 생육신, 사육신들과 함께 박공도 이에 가담하였었다.
결국 단종은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니 단종복위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절개높던 사육신은 형장의 이슬이 되고 김시습 등 생육신은 산림에 숨게되고
그 때 박공도 세조반신의 혐의를 받고 있는 터라 선조의 수관지인 무안에 낙향하여 고절리에 터를 잡고 두문자적하니 오늘날 그 자손이 3천여 세대나 된다.
공은 불사이군의 굳은 절개로 누차에 걸친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고 또 그의 친조카인 정간공 호가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숙부인 공을 찾았으나 공께서 말하기를
“그대는 조정의 고관으로 있고 나는 하시골의 미천한 사람이니 출세의 길이 서로 다른 사이므로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여 끝내 상면을 거절하니 그 조카가 눈물을 머금고
숙부를 보지 못한 채 돌아가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 마을을 고절리라 불렀다 한다.
서거정 선생이 지은 애한정기에도 공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였고 애한정 공이 지은 유응부 선생의 만사를 소개하였으니 즉 “당신이 살았을 때는 사직이 무겁더니
당신이 죽고나니 사직이 가볍도다. 나라의 대들보가 무너져 가니 흔들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가누리” 얼마나 애틋한 선비의 마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공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생존시 공의 선조 면남공(고려시대 정승을 지낸 분)을 위하여 건립한 유산정에 올라 풍월을 읊었고
시골 자제들과 같이 사서오경의 깊은 뜻을 강의 하면서 오롯한 일념으로 세상을 마치니 이조참판 벼슬에 증직하였고 1829년 병산사에 배향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