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 - 박의용
- 작성일
- 2015.12.1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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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풍정 고려정사공신 무안군 휘 진승의 후로 자품이 영수하고 기량이 굉원하였다.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고 또한 지략이 높으니 모든 사람들은 왕좌의 재능을 갖추었다고 찬하였다. 공은 이태조와 포의지구로 모든 일을 쫓아 의논하였다.
1388년 (홍무 무신)에 내직에서 의주목사가 되었다.
철령위문제를 계기로 최영이 요동정벌계획을 주장하여 팔도도통사가 되고 조민수 이성계로 좌우도통사를 삼아 출병하여 오왕과 함께 평양까지 출진하였을 때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날 공이 밀찬모획하였고 뒷날 광주목사에 이배되었다.
이성계가 회군한 뒤에 왕씨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왕을 폐하고 왕씨 중에서 왕을 추대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이 색 조민수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신 창을 왕으로 추대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다시 창 왕을 폐하고 강화에 쫓아낸 뒤 신종의 칠세손 정창군 요를 영입하여 공양왕에 즉위하게 되었는데 공은 신 창을 왕으로 영입하는 것을 저지반론을 명백하게 폈다고 한다.
이때에 정포은 선생은 말하기를 박공의 진언하는 바를 본 즉, 이 색 등의 모영으로 신 창을 영입할 것을 고수한 일은 가위 죄가 된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원종록권에 오르고 특히 대사구에 제수 받아서는 대소죄과를 망라하여 특사조치하고 대사마에 배수되어서는 공이 계획한 일은 공의 계획한데로 용납하고 진언하면
진언한대로 좇아주었으니 주문왕때의 여상(강태공) 같고 한고조 때에 한신 같았다.
공은 태조 말에 글을 올리기를 신이 육경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상 원이 없으며 이제 물러날 수 있도록 하여달라고 원하여 성세의 옥체만강을 비는 글을 올렸다.
상이 감탄하여 그 뜻에 따르고 영중추부사에 특승되었고 병산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