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효행 - (비) 장흥고씨 효열비

작성일
2015.12.14 10:19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061

이 비각은 장흥고씨 4대 효열비각인데 한 문중에서 한 사람의 효나 열이 나오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한 문종에서 4대에 걸쳐 효자와 열녀가 계승하였음은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만하다.

(1) 효자 고형진 고형진은 호를 묵헌이라 하였으며 그 아버지는 시무인데 별호는 약은이다. 시모는 성품이 강직하고 남을 잘 도웁다가 횡화를 입어 박주에 귀향가 무려 20여년을 지낼때 늙은 어머님 못 모시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형진은 아버지인 시무가 귀향길에서 외로운 혼이 될 것만 같이 상경하여 목숨을 걸고 애원하니 모두가 효성에 감동하여 귀향길에서 풀리게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초상에는 시묘를 살았으며,

(2) 형진의 큰 아들 제천의 처는 김해김씨 진환의 딸인데 남편제천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친가에서 지낼때 남편을 원망치 않았으며 2년후에는 남편의 부름으로 돌아왔으나 부부생활은 하지 않아 부인의 나이 41세때야 철 아들을 낳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남편에게 순종하였고,

(3) 형진의 둘째 손자 은주의 처 경주 김씨는 김병식의 따님인데 2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늙은 시부모와 강보에 쌓인 젖먹이를 버릴 수 없어 외로운 등불을 지키며 수절하였고,

(4) 형진의 증손 광의의 처무안 박씨는 박원화의 딸로 시집 온지 3년만에 시어머님이 별세하니 세간을 맡아 어린 시동생을 길러 성혼시키니 30세도 채 못되어 남편이 죽으니 역시 어린 두 아들과 늙은 시아버지 봉양을 위해 남편과 같이 죽지 못하고 오히려 시부를 위안하면서 가문을 지켰으며,

(5) 형진의 둘째 증손 광호는 나주정씨 정기호의 따님을 처로 맞이 하였는데 규범이 정일하여 나이 22세에 남편을 여의고 남편의 시신 앞에서 기동을 하지 않고 같이 죽으려 했으나 낳은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안겨 주면서 이것을 누가 키울 것이냐며 울부짖는 시어머님의 만류에 억지로 일어나 초상을 치고 그 아들을 훌륭하게 기르면서 수절하니 이같이 불운한 가정에 이러한 열부들이 없었다면 이 고씨 가문은 어찌 되었겠는가! 정려를 세우고 찬양함은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로읍 상신기리>

(6) 남편을 출세시키려던 정씨 부인의 열행 1812(순조 12년)에 정려를 짓도록 명하여 그 해 8월달에 몽탄면 달산리 중홍동에 정려를 건립하고 모든 부녀자들의 지표가 되고 있는 이천서씨 익천의 아내인 나주정씨는 1786년(영조 44년)에 나시어 정숙하게 자라나 나이 17세에 서익천에 시집을 와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를 잘 받들고 동서간에도 우애가 깊었다.
서익천은 작은 아들로 분가하여 새 살림을 차리고도 어머님께 드리는 조석문안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한 본시 타고난 재주가 있어 글공부가 뛰어났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우선 먹고 입는 일에 급급하게 되어 학업을 정색하여 남편에게 이르기를 “남아기 이름을 떨칠 방도는 학문을 넓히는 길밖에는 없는데 어찌 당신은 집안을 융성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농군이 되려고 합니까” 하고 조석 끓이는 일은 물론 물긷고, 방아를 찧으며 나무하고 풀 베는 일 등을 혼자 맡아서 할 뿐만 아니라 낮이면 뒷산에 올라가 나무하여 남편의 학자금을 마련하고, 밤이면 글 읽는 일을 도우니 서익천이 뛰어난 재주로 글공부가 날로 진취되어 사람들마다 익천은 부인을 잘 만나서 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열심히 공부한 글을 세상에 한번도 내놓지 못하고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니 그 때 부인의 나이 25세라, 시집온지 8년동안 오직 남편의 출세만을 위해서 고된줄 모르고 정성을 다 바쳤던 부인에게 이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남편이 눈을 감던 날 부인은 칼을 품고 남편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온 집안 식구가 만류할 뿐 아니라 그 시어머니 진씨부인께서“내가 일찍 미망인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말년에 이르러 자식 잃고 며느리까지 잃는다면 내가 눈을 뜨고 어찌 이 일을 볼 수 있겠는가.네가 죽난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죽어야겠다고 식음을 물리치니 정씨부인은 부득히 일어나 어머님을 위로하면서 ”슬하여 한 점의 혈육도 없는 제가 남편 잃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죽기로 결심하였는데 어머님이 이렇듯 하시니 죽지 않고 살겠습니다”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어머님을 모시었다.
그 후 정씨부인은 남편이 글공부하면서 써 놓은 큰 글씨 한 폭을 벽에 걸어놓고 이것은 내 남편이 손수 써 놓은 글씨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으며 그 남편이 그리워지면 뒤적여 보면서 깊은 함숨을 쉬곤 하니 이 광경이 보기 안타까웠다 한다. 또한 남편의 제삿날이며 남편의 이불과 버선을 만들어 불살라 주었으며 친정이 가까운 거리에 있고 양친이 살아 계셨으나 내왕을 하지 않고 혹 생각이 나면 그 쪽을 향하여 절만 하면서 재가 어찌 얼굴을 들고 거리에 나 다닐 수 있느냐 하고 중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으며 동리 사람들도 그의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그 부인이 어쩌다 마을 아낙네를 만나면 시어머님의 말씀과 집안 식구들의 보호로 남편의 뒤를 따르지 못했지만 한 점의 혈육도 없는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죽어서 남편이 곁에 의지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곤 하더니 남편이 세상을 떠난 7년만인 1799년 눈내리는 겨울밤에 집안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곡간에 들어가 목을 메어 7년전 남편의 뒤를 따르려던 뜻을 이루니 인근 마을 사람들이 콧물을 홀리며 아침밥을 걸렀다 한다.
정씨 부인이 이렇듯 순절한 뒤에 그 시동생이었던 익환이 자식없이 살다간 형수의 정상을 슬퍼하고 그 큰 아들 필순으로 뒤를 잇게하고 그 이듬해 호남유림의 천거를 받아 조정에 포상 해 줄 것을 헝하니 그 때가 정종대왕 23년이었다. 정종대왕께서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토록 명하였으나 그 포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돌아가히니 그만 묻히게 되었으나 익환이 여러번 서울로 올라가 대신들을 찾아서 그 정성을 아뢰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이 한탄하다가 뜻을 못이루고 세상을 떴다. 그러나 10여년 후인 1812년(순조 12년) 포상과 함께 정문을 지으라는 명령이 내리니 익천의 형님 익찬과 동생 익현이 힘을 모아 정문을 짓고 불쌍하게 살다간 정씨부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몽탄면 봉명리>

(7) 진주소씨 소씨 부인은 1840년(헌종 6년)에 소정면의 여식으로 태어나 무안군 현경면 오류리 김해 김지?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저성으로 받들고 종족간에 화목이 극진하였으며 시부께서 앓게 되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회생하게 하였으며 남편이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드리고 자기 ?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므로 1주일간의 생명을 연장케 하였고 숨을 거두자 3년간을 죽만 먹고 연명하는 열성을 보여 향중의 추천으로 비각을 세웠다. <현경면 오류리>

(8) 효부 금성나씨 송재 세찬의 후 채환의 녀로(1951년 5월 4일생 병선자) 무안인 박충석의 처가 되어서 효를 옮기어 늙으신 사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지체를 평안케 하며 화목을 도모하니 향리가 긍식하다.

담당부서
관광과
061-450-5474
  • 조회수 397,7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