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산사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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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소개

전시관 전경

무안지역에서는 초의(장의순) 대선사가 무안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삼향면 출생 지역민과 일부 차에 관심이 있는 군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특히 초의선사가 시, 서, 화에 능할 뿐 아니라 선승(禪僧)이자 다성(茶聖)으로 불교계 QNs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은 더욱 알지 못하였다.
초의선사가 위대한 무안인 임에도 지역에서는 그 존재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음을 알고 자체적으로 자료수집과 현장사업을 게획하고 있던 차에 정부에서 97년 5월의 문화인물로 초의선사가 선정됨을 계기로 선사의 현창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게 된 것이다.

현창사업 개요

초의선사

무안군은 95년부터 해남 일지암과 초의문화제등 초의선사와 관련된 자료수집을 마친후 97년 4월 선사의 출생지인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 본격적인 현창사업을 범군민 운동으로 실시키로 하고 학계, 종교계, 지역민, 차 관련협회 등 전국의 저명인사 75명으로 현창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민의 참여 붐 조성과 현창사업 기금 모금등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이제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군은 5월의 문화인물 선정 기념사업으로 초의선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비(문화관광부) 지원을 받아 97. 5. 17 “초의선사의 생애와 문화적 고찰” 이란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여 선사의 고향에서 처음으로 선사의 위대한 정신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미나에서는 “초의선사의 생애와 다사상” 에 대하여 초의문화재단의 석용운 스님이, “초의선사의 선관”에 대해서는 원광대학교 한기두 박사, “초의선사의 시문학고”에 대해서는 아주대학교의 최병식 박사의 주제발표에 이어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초의선사의 발자취를 유적지 답사를 계획하여 최초 출가지인 나주 다도 운흥사와 일지암등을 답사하므로써 초의선사에 대한 지역민의 이해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군은 초의선사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추모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출생지인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15천여 평이 부지를 매입 생각복원, 추모각, 추모비, 유물전시관, 다도관등을 건립키로 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초의선사 현창사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크게 진입공간, 기념공간, 상진공간, 전시공간, 참배공간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99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요시설로는 초의선사의 사상을 상징하는 일지암과 생가를 복원하고 초의선사의 시·서·화·선·다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공간을 건립중에 있다. 초의선사를 참배하는 공간으로는 계획부지의 최상단에 추모각과 추모비를 배치하고 주변에는 초의선사의 다도비, 시비 등을 건립 전체공간이 초의선사의 각종 사상을 재조명할 수 있도록 조성할 계획이다.

초의선사의 생애

초의선사

초의(草衣)는 조선 정조 10년(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흥성 장(張)씨이며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초의(草衣)라는 호는 출가 후 스승 완호(玩虎) 윤우(倫佑)로부터 받은 것이며 일지암(一枝庵)은 재호(齎號)이다. 15세때 나주시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였으며 19세때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완호(玩虎)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탱화를 잘그려서 당대 오도자(吳道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金正喜)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39세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草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가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歸故鄕)이라는 시이다.
1866년(고종 3년) 7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

초의선사의 사상

  • 차사상(茶思想)
    차사상

    조선(朝鮮)의 유교문화(儒敎文化)와 중국차에 밀려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한국차를 오늘까지 이어지게 한 다도(茶道)의 중흥조(中興祖)였던 스님의 다도(茶道)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끊이며 그 잘 끊는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동다송(東茶頌)에서 다도(茶道)란 신체건령(身體健靈)을 함께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 시사상(詩思想)

    초의(草衣)의 시풍(詩風)은 맑고 담아(淡雅)하며 속성을 벗었고 간결(簡潔)하면서 명료(明瞭)하여 당송(唐宋)의 시풍에 결코 뒤지지 않느다고 하였으며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은 초의(草衣)를 시승(詩僧)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초의선사 친필1
    초의선사 친필2
    (초의선사 친필)

    또한 스님은 선(禪)과 시(詩)가 둘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으니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정신(精神)으로 시(詩)로써 선(禪)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다.

    시사상1
    시사상2

    이러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시(詩)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思想)에 잘 나타나 있다.

  • 선사상(禪思想)
    선사상1
    선사상2

    또한 스님은 선(禪)과 시(詩)가 둘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으니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정신(精神)으로 시(詩)로써 선(禪)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다.

초의선사의 저서

  • 일지암시고

    스님이 일생동안 선의 여가에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지은 시이다. 모두 사권으로 되어 있는데 필사본으로 필사한 사람은 알 수가 없고 사권이 한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책은 고효당 최범술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가 1975년에 보련각에서 영인(影印)하여 펴냈다.

    일지암시고1
    일지암시고2

    권일(券一)에는 109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30대의 작품으로서 (22세에서 44세대까지 작품) 22세때 화순 쌍봉사에 가서 지은 최최의 시 ‘팔월십오일효좌’를 비롯해서 다산(정약용)선생에게 지어 드린 시,

    그리고 처음으로 상경하여 유산(정학연), 운포(정학유), 추사(김정희), 산천(김명희)등 형제분들과 교유하면서 읊은 시, 그 후 경주 불국사에 가서 쓴 회고의 시 등이 실려있다. 권이(券二)에는 110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45세에서 46세 때까지 2년동안의 작품이다. 일지암을 짓고 은거한 후로 지은 ‘중성일지암’시와 45세때 두 번째로 서울에 올라가서 수종사, 두릉 , 채화정, 청량사, 용문사, 열수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해거(홍현주) 유산, 운포, 진제(박종림), 광산(박종유), 뇌원(홍의인), 경당(윤정진) 등과 화운(和韻)한 작품 42수가 있다.

    권삼(券三)에는 47세에서 57세까지 11년 사이에 지은 122수가 실려있다. 일지암으로 북산도인 변지화가 찾아와서 함께 화답한 시와 암자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지은 ‘종죽’시, 이 시에서는 은거인의 맑고 담아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 후 금강산에 구경갔다가 그곳에서 지은 시가 있고, 돌아올 때 서울에서 해거, 추사, 산천과 화운한 시 10수가 포함되어 있다. 권사(券四)에는 58세 때부터 65세까지 8년동안에 지은 시 60수가 실려있다. 이 가운데 8수는 신관호, 황상, 산천, 유산, 운포 등과 함께 지은 것이고, ‘귀고향’시는 58세때 40년만에 고향에 가서 눈물로 쓴 작품이다.

    65세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있으나 이 책에는 실려있지 않고 따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외로도 서예가 창암(이삼만)선생과 화운한 시가 여러편 전해지는데 이 책에서는 빠져있다. 그리고 시고 말미에 석요(윤치영)와 멸당(신관호)과 백파거사(신헌구)의 발문이 붙어 있다.

  • 일지암문집

    이 문집은 스님이 일생동안 지은 소, 기, 서, 발, 상량문, 제문. 축문, 영찬 등 52개 항목과 부록으로 탑비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필사본으로 광제 16년(1890)에 그 문인 월여범인 스님이 편집하고 원응계정 스님이 정서해서 펴냈다. 스님이 열반에 드신지 24번째 되던해 5월에 산일되어 있던 것을 한데 모아서 묶은 것이다.

    이 문집의 체제를 보면 전이권 일책(全二券 一冊)으로 되어 있고 뒤에 부록이 첨가되어 있다.

    일지암문집1
    일지암문집2

    권일에서는 소삼편, 상량문 4편, 기 5편, 서문 8편, 발문 2편으로 모두 22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천불전상량문과 천불기, 그리고 표충사이건기와 상량문, 그의 스승인 완호법사의 탑비음기와 대둔사 출신의 승계보를 적은 승보안서발문.

    그리고 말년에 대광명전과 보련각을 창건하고 서산대사 이후 대흥사에서 배출된 12대 종사와 12대 강사 스님을 비롯해서 고승대덕 172위의 영을 보신 대관명전 상량문을 지었다. 또 일생의 지기였던 해거도인 홍현주의 시집발문을 실었다.

    권이에는 발 5편, 모연문 2편, 권선문 1편, 보살계비규 1편, 법문 1편, 제문 9편, 축문 2편, 영찬 3편, 서간문 6편 등 모두 30개 항목이 실려 있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해인사 대웅전과 대장경각중수권선문과 대둔사탑원다례제문, 그리고 스님의 출가 사찰인 운흥사에 가서 법문한 보살계법문과 은조사 백력화상의 영천, 원당 김정희공의 제문과 수계은사의 제문, 그리고 문도형제의 제문과 법제사와 상좌제문, 또 동다송을 저술해서 보낼 때 함께 보낸 편지‘상해거도인서’와 추사에게 답한 ‘답쌍수도인’, 다산에게 보낸 서간문 등이다.

    부록으로 신현이 찬(撰)한 ‘초의대종사탑비명’과 ‘초의화상게’와 송파거사 이희풍이 찬(撰)한 ‘초의대사탑명’이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대승계를 받은 ‘수대승계자명’이 실려있다.

  • 초의선과

    초의선과는 선의 요지를 밝힌 ‘선문점송’중에서 그 골자만을 가려내 주석을 달아 만든 책이다. 한지 일책으로 되어 있는데 가로가 19cm 세로가 27cm 크기로 전부 34장이다.
    이 중 표지가 2장이며 서문이 1장 본문이 31장 55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초의선과1
    초의선과2

    ‘영남에서 온객이 말하기를 자기는 목부산 육음노인(백파선사)의 법제자라고 했다.비가 와서 십여일 묵는 동안에 스승의 선론(禪論)을 말했는데 그 중에 옛 고덕(古德)의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므로 본래의 뜻에 따라 바로 잡는다’ 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선에 대해서 서설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모두 55개항목으로 나누어서 문단의 형식으로 원문을 앞에 놓고 각항마다 주석을 달아 엮어 나간다.

    그 첫머리에 ‘점송승주’라고 제(題)하고 그 밑에 ‘자우주석’이라고 하였다. 자우는 초의선사의 당호로서 자우산방의 줄인 말이다.

    또 ‘일지선방 중수자술’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지암을 말하는 것으로 일지암은 39세에 지어서 40여년간 ‘독천지관’ 하시던 곳이다. 그리고 중부자란 스님의 자이다.

  •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선문사변만어는 어느 여름날 영남에서 왔다는 백파선사의 법제자로부터 백파선사의 선론을 듣고서 그 틀린곳을 바로 잡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그 경위는 사변만어 첫 머리에 상세히 나와 있다.

    선문사변만어1
    선문사변만어2

    ‘영남에서 온객이 말하기를 자기는 목부산 육음노인(백파선사)의 법제자라고 했다.비가 와서 십여일 묵는 동안에 스승의 선론(禪論)을 말했는데 그 중에 옛 고덕(古德)의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므로 본래의 뜻에 따라 바로 잡는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변만어를 저술하게 되었는데, 그후 계축년(1913) 6월 10일에 증법손 벽담대사와 경연스님이 주관하여 인간(印刊)하게 되었다.

    그 체제를 보면 일책 전 22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머리에 원응계정스님이 쓴 ‘서문’이 들어 있고. 그 다음에 본문이 12장에 걸쳐서 이어진다.

    말미에 ‘이선래의’와 ‘격외의리변’, ‘살활’. ‘진공묘유변’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이선래의. 격외의리변, 살활, 진공묘유변은 초의스님의 견해를 밝힌 것이요, 사변만어는 백파선사의 선론을 한구절 쓰고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규명하는 요령으로 스님의 견해를 붙였다.

  • 동다송(東茶頌)
    동다송

    동다송은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의 전문서이다.
    스님이 나이 52세(1837년) 되던 해 봄에 ‘다도’를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에게 저술해서 보낸 것이다.

    이 동다송은 처음에는 ‘동다행(東茶行)’ 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동다송’으로 바꿨다.

    이 책의 체제와 내용을 보면 모두 31송으로 되어 있는데, 각 송구(頌句)마다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옛 고전인 다경과 선이기, 만보전서, 다시 등 21개 문헌을 34회에 걸쳐 인용하여 스님의 다론이 ‘고인소전지의’에 어긋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다.이러한 동다송의 대의를 살펴보면 세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셔라.

    둘째, 우리나라 차(東茶)는 중국의 차에 비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욱안다의 맛이나 몽산다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 차에는 현묘함과 지극한 경지가 있어 ‘다도’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의 다도관을 완성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네 종류가 있는데, 일지암 소장본과 홍현주 소장본, 다예관본과 윤지영본이 그것이다. 본문에서 밝힌 바 대로 일지암본과 윤치영본만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예관본은 태평양화학다예관에 초의스님의 다른 유품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고, 석오 윤치영본은 서울 이일우씨가 소장하고 있다.

  • 다신전(茶神傳)

    다신전은 차 생활에 필요한 차의 지침서로서 스님이 45세(1830년) 때에 일지암에서 정서해서 펴낸 것이다. 다신전은 스님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고 중국의 ‘만보전서’라는 백과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다경채요’의 원문을 초출해 내서 제명을 하고 발문을 달아 만든 책이다.

    다신전1
    다신전2

    그러니까 스님이 23세(1828년) 때 여름에 지리산 칠분선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등묘(等妙)해 가지고 와서 사원에서 다(茶)를 알고자 하는 이가 많아 그 2년뒤인 경인년 봄에 책명을 ‘다신전’ 이라 하고 그 경위를 말미에 달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의 체제와 내용을 보면 전부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채다론(採茶論), 조다(造茶), 변다(辨茶), 화후(火候), 탕변(湯辨), 탕용노수(湯用老漱), 포법(泡法), 투다(投茶), 음다(飮茶), 향(香), 색(色), 미(味), 점(點), 양실진(梁失眞), 다섭불가용(茶燮不可用), 품천(品泉), 정수불선다(井水不宣茶), 저수(貯水), 다구(茶具), 다잔(茶盞, 식잔포(拭盞布), 다위(茶衛)’ 등이다. 그리고 말미에 발문을 달아 놓았다.

    이 다신전은 현재 ‘다예관’ 에 소장한 것이 있고, 일본인 가입일웅이 쓴 ‘조선의 다(茶)와 선(禪)’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있으며, 일지암에 소장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에관본’관 가입일웅이 등초한 것과 ‘만보전서’의 원문이 있을 뿐이다. 그님이 친필로 쓴 ‘일지암본’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

  •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
    진묵조사유적고1

    진묵조사유적고는 초의스님이 1847년 봄에 지은 것이다.
    이 책을 찬술하게 된 경위는 발문에 상세히 나와 있다.
    ‘내가 임인년(1842) 겨울에 은호 김공을 완산(전주)에 만났을 때 공은조사의 자취를 매우 상세하게 말하였으며, 또 두어곡의 쌀을 준비해서 뜻을 같이 한 두명 선비들과 함께 성의를 모아 봉서사에다 조사의 실적을 기록하여 문을 진무(鎭撫)하고야 말았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도를 멀리까지 전파하려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 6년 뒤인 정미년(1857년)봄에 봉서사에서 왔다는 어떤 스님이 나의 거실인 일지선방으로 나와 찾아와 역시 이 일로써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는지라 김공의 뜻에대한 감회도 있고 또 지금 청하는 이에게 등을 돌리기도 어렵고 하여 그 전해오는 구비의 사실을 대략 기록하였으니 운�P에게 전하여 고명한 김공의 수정을 요청한다.’라고 하였다.

    진묵조사는 명종 17년(1562년)에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조사의 휘는 일옥이며, 진묵은 법호이다. 인조 11년(1633년)에 입적하니 나이가 72, 법랍이 52, 10월 28일이었다.

    이 유적고의 체제를 보면 은고거사 김기종의 서문이 먼저 실려있고. 그 다음에 초의스님의 서문이 있다. 그리고 본문 유적고 상권이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모두 18개 항목으로 나누어 신이(神異)한 행적을 기록하여 놓았다. 그리고 상권 말미에 ‘석가여래인지’ 4장이 실림으로써 상권이 끝난다.

    다음 하권에는 조수삼의 ‘영당중수기’와 초의스님의 발문, 운호스님의 발문, 김영곤의 발문, 김영학의 발문 등을 하권으로 묶었다. 이와같이 상하 2권 1책으로 해서 엮었는데, 이 유적고가 아니고는 진묵대사에 대한 행장을 알길이 없다.

    다른 문헌에는 대사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므로 이 기록이 유일한 것이다.

  •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

    스님이 평소에 지은 서(序), 발(跋), 제문(祭文), 서간 등 11편을 수록한 수고 초본이다.
    그 편목은 모두 필사본 일지암문집과 중복되나, 이 전집에서는 스님의 수고의 편린(片鱗)을 보이는 뜻에서 부재(附載)하였다.

    문자반야집1
    문자반야집2

    다만, 특기할 것은 ‘상해거도인거서’의 경우, 편명 다음에 ‘정유하’라는 주기가 있고, 본문 가운데에 ‘근술동다행일편이진헌’이라는 구절이 있어 ‘동다송’의 저술시기가 정유년(1827) 여름이었으며, 처음에는 ‘동다행’이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 초의시고(草衣詩稿, 목활자본)
    초의시고

    스님의 입적 40년인 병오년(1906년)에 그 법손 선운응혜와 법재 쌍수일간이 인간(印刊)한 목활자본이다.
    전 2권 2책이며,권지하 후반에는 문이 실려 있다.
    권수(券首)에 홍석주 및 신위의 서(序), 권말(券末)에 윤치영 및 신헌구의 발(跋)이 있는 것은 필사본 일지 암시고와 같으나 신관호의 발이 빠지고 ‘병오사월하완지일일 원응계정근서’ 라는 발이 있다.
    수록 편수로 보면, 시편은 일지암시고와 차서(次序)의 차이는 있으나 편목(篇目)은 동일하며 문편(文篇)은 일지암 문집보다 훨씬 적게 실려 있다. 전권에 걸쳐 문잔의 이동(異同)이 산견(散見)된다. 이 전집에는 수록하지 아니하였다.

한국의 차

  • 다도정의

    茶道란 차를 마시는 멋과 더불어 인간의 건전한 삶의 길을 걷자는 것을 말함이다. 정상구의 『韓國茶文化學』에서는 건전한 삶의 길이란 심신(心身), 즉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하며 멋속에 삶의 도리를 다하자는 것으로 논하고 있다.

    차사상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기호음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 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차는 우리 인간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이다.
    뿐아니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알뜰한 각성의 생활을 체득(體得)하게 된다.
    즉, 다도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면에 있어 사심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기르고 나아가 봉사하고 일하는 실천력을 기르고 이를 통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다같이 한없는 기쁨속에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 다도정신

    한국의 다도정신은 이미 신라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

    초의선사 친필1

    다도정신의 기원은 화랑도에서 엿볼 수 있으며 한국다도정신의 뿌리는 원효의 화쟁지화 (和諍之和)정신과 그의적지적(寂之寂)정신, 즉 靜정신에서 일어났다고 논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다도정신은 원효성사의 화정(和靜)정신을 기조로 하여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의 다시, 정몽주(鄭夢周)의 다시를 비롯하여 조선조시대의 서산대사의 다시 그리고 초의선사의 다시 및 다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다도역사

    중국에서 시작된 차는 승려들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함께 전해지거나 통상무역의 발전에 따라 세계 각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당시 수양을 하는 승려들은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없애준다고 하여차를 애용하였기 때문에 사원에는 항상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선사상1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티벳왕에게 시집을 가면서 차를 가지고 가 티벳에 음다(飮茶 ) 풍습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차가 외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서기 805년에는 일본의 승려 사이조우선사가 중국에 불교를 배우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종자를 가지고 와서 일본 자가현(滋가縣)의 고꾸다이산(國公山) 기슭에 파종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보급은 1187년에서 1191년 사이에 에이자이선사가 차 종자와 더불어 차의 제조법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가야시대부터 차종자가 전해졌다는 주장도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이후부터 사찰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유의 茶는 초의선사의 동다송에 의하면 우리나라 古來로 장백산에 백산차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장백산 중에 있는 나뭇잎을 따서 알맞게 다려 사람들이 마셨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다문화의 전성기로 왕과 귀족 관리 백성들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다를 즐겨 마셨다. 茶는 귀중한 예물로써 왕이 신하에게 茶를 하사하였으며 궁중의 여러 행사를 준비하는 다방(茶房)이란 관청을 두었고 일반 백성들이 茶를 사서 마실 수 있는 차점(茶店)을 설치하여 茶를 마시는 풍속이 사 회전반에 성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왕실과 조정의 의례에서도 茶가 사용되고 조선예법의 기준이 되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제사,혼례,사당의 제례등에 茶를 올리는 헌다(獻茶)의 법도가 있어 양반 관료 사회에 음다(飮茶) 풍속이 성행되었다.
    조선중기 왜란, 호란 등 양란이후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茶생산이 감소되어 다문화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사원의 승방에서 음다(飮茶)의 생활과 조다(造茶)의 기술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
    조선 말기에 다산정약용, 추사금정희 초의대선사가 쇠퇴한 다문화를 다시 일으키고 특히 초의선사는 해남에 일지암을 중건하고 40년동안 茶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한국다문화를 중흥시켰다.

  • 차의 종류

    차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 색(色), 향(香), 미(味)가 달라지고 또 이름도 다르게 부른다.
    찻잎을 발효시켜 만드는가 발효시키지 않고 만드는가에 따라 다르며, 또 쪄서 만드는가 볶아서 만드는가에 따라, 제조방법 및 품질, 색 등에 따라서도 구별할 수 있다.

    국화차
    (국화차)
    생강차
    (생강차)
    감잎차
    (감잎차)
    오가피차
    (오가피차)
    오미자차
    (오미자차)
    감초차
    (감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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